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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May 14. 2023

침략자

이 이야기의 처음은 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기억도 안나는 그 시절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와 큰맘먹고 지금 살고있는 우리집 자리의 논을 샀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무렵부터 나는 주말마다 두개의 선택지가 놓였는데 하나가 엄마와의 등산이라고 불리우는 임산물 채취 였고 다른 하나가 아버지와 막걸리 한잔이라고 불리우는 논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교활동이라는 꼼수로 현명하게 주말일정을 조절해 나갔다. 


이천년도 초반쯤인가 일동에서 나오는 도로가 우리땅의 절반을 잘라갔고 그렇게 우리땅은 반으로 쪼그라 들었다. 원래 논이었는데 길을 낸다고 흙을 많이부어서 이제는 논이되기는 어렵고 밭이되어야만 했다. 밭이어도 좋았다. 파주골 험악한 돌산에서 감자 키우면서 살다가 내땅을 누리면서 사는 보람이 아버지 형제간에는 즐거움이었으니까. 나는 그런것도 모르고 주말마다 끌려가서 밭에서 아버지랑 고구마심고 옥수수심고 그랬다.


이천십년도쯤이었나 음악을 좋아하는 작은아버지는 외진 이곳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놀이방 개념의 무언가를 시도했었는데 민가와 3Km 이상 떨어져있었음에도 저음으로 울리는 베이스는 동네 개들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고 하나를 거슬러서 울리기 시작한 경보장치는 온동네를 울렸으며 곧 인근지역 지구대 경찰차를 만났다. 그 뒤로 작은 아버지는 더 깊은 산골을 찾아 떠났고 남은 지분을 아버지가 인수해서 오롯이 아버지의 땅이 되었다. 오백평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땅 실향민인 아버지 입장에서 땅이 주는 의미는 무척이나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의미를 상상조차 할수없을만큼 존재가 성취인 것이 바로 내 땅인것이다.


우리집 땅 맞닿는 부분에 삼각형 모양의 땅이 있는데 이게 110평정도였다. 물이 나오지않는 땅이어서 우리집 물(지하수)을 길어다가 농사를 지으셨고 동네어르신 이니까 오실때마다 엄마는 커피를 드리고 음료수를 대접했다. 처음에는 물을쓰시는것도 눈치보인다면서 무척이나 어려워 하셨는데 나중에는 편하게 그냥 가져다 쓰시고 우리도 전혀 이런것에 개의치 않았다. 지하수로 나온 물을 가져다 쓴다는것은 물세를 내는것이 아니라 전기비용을 지불하는거라서 엄밀히 따지면 일반 수도세보다 조금 비싼 일이지만 시골동네라는것이 그렇고 적용되는 법과 윤리의 개념이 서울과는 많이 달랐다. 농사짓는데 분명 물을 많이 쓰는게 맞았지만 또 농업용 전기요금은 생각보다 저렴했다.


그런생활이 다시 10년쯤 지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농사지으시던 그 밭에 어느순간부터 풀이자라났고 두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식들은 그 땅을 팔아서 유산을 분배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와 맞닿은 땅이니까 자연스럽게 우선협상대상처럼 우리에게 협상권이 왔는데 땅을 흥정하는 방식이 너무 오래걸리고 힘겨웠다. 연락을 바로 준다고 하고 두달뒤에 연락을 준다거나 또 갑자기 전화와서 계약서를 쓰자고 하는식의 두서없는식의 거래였다. 이런식으로 이년을 끌었다. 아버지는 땅값을 깎자고 하는게 아니니 순리대로 원만한 거래를 원했지만 그 아들들은 우리말고도 부동산에 내놓고 아랫집 아저씨와 경쟁을 붙였으며 제값을 받기위한 끊임없는 노력을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이 부동산과 함께 등장했다. 밭을 메고있던 나에게 다가와 살가운척을 했지만 같이온 부동산 중개인이 나를 보는 표정이 조마조마 함을 느낄수있었다. 표정이 조마조마한 만큼 도와달라는 뜻이었으리라. 옆집 땅을 사러왔다는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초면에 나보고 방음벽을 치는것이 어떻겠냐며 함께 민원을 넣자고 했다. 도로보다 나중에 생긴 우리집이 방음에 대해 말할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때문에 무엇인가 새로운 접근이었지만 무튼 첫만남이 그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산 실거래 사이트에서 거래내역이 떴고 우리가 제안한 금액과 총액에서 300만원 차이가 났다는걸 알았다. 물론 다운계약인지 업계약인지 우리는 알수없다.


얼마 지나지않아 분주히 공사가 시작되었다. 110평. 평당 40만원대의 농지에 축석을쌓고 마당에 잔디를 심었다. 3층 농막과 데크를 깔고 캠핑카를 마당에 주차했다. 이걸 세팅하는데만 이억이 들었다고 했다. 울타리를 치고 하우스를 쳤는데 하우스 안에는 수영장을 설치했다. 농지는 분명 농사를 짓는땅인데 바베큐용 상추를 심는 한평 남짓의 땅을 제외하고는 펜션을 방불케했다. 재미있는건 이 땅을 산사람은 동네에 새로생긴 골프장 중역이라고 했던것같은데 바닥을 다지는 공사도 농막공사도 골프장 관리하는 회사에서 해주고갔다. 잔디를 심을때도 나무를 심을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차근차근 다가왔다.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이 '서울사람'은 지하수마저도 가정용이 아닌 산업용  '대공'이라는 대구경의 파이프를 팠고 옆집인 우리는 당연히 물부족에 시달렸다. 일주일에 이틀와서 지내는 사람때문에 당장 우리는 지하수를 다시팠다. 우리에게 분명 속상한 일은 맞지만 그분은 법을 어긴게 없으므로 우리는 그냥 속앓이를 하면서 지하수를 다시 팠다. 상수도를 끌어오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있었는데 바로 주말만되면 열리는 파티였다. 그분들이 무슨차를 타고 무슨 맴버쉽인지 세세히 언급하기는 어려우나 평생을 벌어도 만지기 힘든 돈의 차를 타고와서 주말마다 밤새 노래를 틀고 또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공손하게 부탁도 해보고 협조해 주는듯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고 나중에는 경찰을 불러도 왔을때만 잠시고 경찰이 떠나면 다시 소리를 더 키워서 보란듯이 노래를 틀었다. 코로나 팬데믹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일의 고단함을 주말 전원에서 풀고자 하는것은 알겠으나 그들은 우리의 고통위에 본인들의 행복을 쌓고있었다. 내가 이곳에 계속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내가 집에 없을때 우리집에 해코지를 할수있는 위험도 생각해야했다. 늙으신 부모님 두분이 사는집에 카메라 말고는 기댈곳이 없었다.


면사무소에 연락해서 민원을 넣었다. 110평의 농지에 상추밭 한평을 제외하고 모두가 잔디밭 내지는 수영장으로 구성된 이것이 농지와 농막을 구성하는 취지에 맞는일인지에 대해서 민원을 제기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문제가 없다는 답을 받았다. 문득 시골마을 한복판에 생긴 거대한 골프장이 떠올랐고 이들은 이미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무언가가 굳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동네 경찰역시 마찬가지. 경찰은 소음문제가 발생하면 나보고 직접 그 소음발생하는 장면을 직접 촬영해서 보내라고했다. 이들과 직접 싸움을 하라는 이야기인가. 무언가 거대함앞에 막연함이 들었다. 


11개월만에 집에왔다. 태어난지 45일된 아이와 함께였다. 늙으신 아버지는 손주가 집에 온다고 금줄을 만들어 현관에 걸었다. 아들이라고 고추를 달았는데 잘생긴 고추 구하기가 힘들었다면서도 아버지는 즐거워 하셨다. 집에 돌아온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주말이었는데 이들은 어김없이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다. 경찰을 부르기전에 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협조를 바랬지만 전화를 받지않았다. 태어난지 45일된 아기는 한밤중 소음에 울기 시작했다. 경찰을 불렀지만 왔을때뿐이었고 다시온 경찰에게 그들은 도대체 누가 신고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골의 말도 안되는 텃세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의 고통에 행복을 쌓는 외지인역시 반갑지않다. 나는 내일 면사무소를 건너뛰고 시청으로 가볼생각이다.


이게 대한민국 농막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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