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적 우리 가족의 가난한 삶의 둥지가 놓여있던 골목은 자못 포근했다. 그 골목과 나의 인연은 아직 내 눈높이가 다 일어선 백구의 눈을 마주 보지도 못했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2호선 건대입구역에서 올라와 언덕배기를 지나자마자 있던 그 골목 입구엔, 하도 작은 탓에 얼핏 봐서는 저게 무슨 건물이지 싶은 교회 하나가 방문객들을 반겼다. 그리고 그보다 스무 걸음 정도 뒤에 <덕흥슈퍼>라는 간판을 내건 구멍가게가 있었다. 몇 차례 이사를 다녔지만 나의 집은 덕흥슈퍼를 기준으로 좌우 100m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보냈다. 외할머니댁도 그 골목에 있었는데, 우리 집과의 직선거리는 길어야 70m 정도였고 가장 가까울 땐 10m 정도였다. 아버지의 이른 실직으로 가세가 기운 탓에 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방증하는 수치라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닐 테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그곳에 정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반세기 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67년생인 우리 엄마가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다.
그 조그마한 골목의 역사를 전부 알고 있는 할머니는 골목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당신 특유의 ‘인싸력’을 십분 발휘하셨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동네 어르신들에게 ‘공부 잘하는 106호 형님 손자’로 불렸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화투를 치시러 골목 이곳저곳을 누비셨다(승률은 그리 좋지 못했다). 승패에 아랑곳 않고 친목 그 자체를 즐기시는 ‘인싸력’ 덕분에 나는 지나갈 때마다 꽤나 많은 골목 어르신들께 90도 인사를 올려야 했다.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했으므로, ‘인싸’인 할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선 예의 바른 인사가 필수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어렴풋이 느꼈지 싶다.
내가 인사를 드렸던 동네 어르신들 중에는 연이네 할아버지와 연이네 할머니도 있었다. 두 분은 골목 초입에 놓인, 내겐 ‘연이네 가게’로 훨씬 익숙한 덕흥슈퍼라는 구멍가게(이 역시 할머니의 노름판 권역이었다)를 운영하시던 노부부였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두 분이 가게를 내신 것은 할머니가 골목으로 이사 온 지 5년 안쪽이라고 한다. 그 말인즉슨, 엄마와 삼촌도 이 가게에서 군것질을 하고 딱지를 샀단 이야기가 되겠다. 이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구멍가게는 그 장구한 역사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쿰쿰한 지하실 냄새가 나곤 했다. 그래도 나름 장사가 잘 되었던 것인지, 월세방보다 조금 큰 크기의 가게를 좁다란 골목 양쪽에 내셨다.
다른 초등학생과는 달리, 군것질에 큰 흥미가 없었던 나였지만 연이네 가게의 입지가 우리 골목에서 워낙 독보적(?)이었던 탓에 나 역시 이 유서 깊은 구멍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주로 내가 좋아하던 몇 안 되는 과자였던 스X칩이나 고래X 등의 과자를 사거나, 아니면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사장님’이셨던 연이네 할아버지께서 가게에 계셨는데, 내가 갔을 때마다 “어이~”하는 특유의 인사말로 나를 반겨주셨다. 그리곤 정말 멋과 정성이라곤 1도 느낄 수 없는 투박한 검은 봉다리에 그보다 더 투박하게 생긴 손으로 과자를 툭툭 털어 넣으시곤 했다. 날짜를 정하지 않은 잦은 외상은 동네 ‘인싸’ 할머니의 손자에게 주신 사장님의 특혜였다.
연이네 가게는 나에게 골목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철물점, 빌라, 성당, 하숙집 등 여러 랜드마크(?)들이 세워지고 허물어지는 와중에도 연이네 가게만큼은 부대를 지키는 헌병처럼 늘 같은 곳에 묵묵히 서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가며 점차 그 가게에 들를 일은 줄어들었지만, 연이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마주칠 때마다 내 인사를 잘 받아주셨다. 우리 할머니와도 서로 잘 알고 계신 노부부셨기에, 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으시곤 어느 날 가게 근처를 지나가던 내게 입학선물이라며 학용품을 거저 챙겨주시기도 했다.
그런 연이네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은 내가 군대에 들어간 뒤였다. 그보다 5년 전인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우리 골목 전체를 대상으로 재개발 논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소싯적 다년간의 금은방 운영으로 골목 최고의 상인적 협상감각을 지니셨던 할머니는 골목에 있었던 빌라들의 반장 격으로 재개발 업체와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할머니는 돈이 급하니 적당한 가격에 팔자는 여론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있었다. 단 한 평이라도 거저 줄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은 협상 내내 이어졌고, 지리한 줄다리기 끝에 우린 제 값을 받을 수 있었다. 협상이 타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에 있었던 세탁소, 철물점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더니, 내가 군대에 간 후엔 연이네 가게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 역시 이내 그 골목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골목을 떠나 이곳 중곡동으로 이사 온 지도 올해로 만 5년이 넘었다. 그러나 머리가 크고 나서 온 이유일까, 도통 이곳엔 정이 들지 않는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 모두가 화양리 그 골목을 그리워하고 다시 그 근처로 이사 가자는 말을 심심치 않게 한다.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루는 가족 외식을 하러 그 근처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여느 날처럼 오붓하게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철거를 앞둔 우리 집을 들러보자 했다. 어느새 빌라는 과거에 사람이 살았으리라 짐작할 만한,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긴 채 침묵하고 있었다. 텅 빈 우리 집을 본 엄마는, 그 자리에서 눈가가 촉촉해지시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리셨다.
"가족을 버린 느낌이야."
엄마는 소녀 같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헬스장부터 미용실까지 여전히 그 골목에 살 때 이용하던 곳을 이용하고 있다. 나 역시도 동네를 한 바퀴 뛸 때면 제법 먼 거리임에도 꼭 그 근처를 지나온다. 때때로 일부러 그 골목을 들러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떤 날에는 숙제를 하지 않아 엄마에게 혼나 밖에서 훌쩍이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동네 어르신들과 수다 삼매에 빠지신 할머니를 보기도 한다. 또 연이네 가게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괜스레 인사를 해야만 할 거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내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높게 솟은 오피스텔과 상업 시설들이 부리부리한 얼굴로 이제는 그곳의 주인이 자신들임을 엄포하기 때문이다. 가장 익숙했던, 그리고 지금도 가장 익숙한 곳에서 이제 나는 왠지 모를 위축감과 거리감을 느낀다. 마치 내게 “우린 정당한 값을 지불했으니, 이제 당신은 이곳에 대해 말할 아무런 권리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달까. 과장 좀 보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가족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 그 골목은 예전보다 깨끗해지고 세련되어졌다. 매 여름마다 파리가 수 십 마리씩 들끓던 쓰레기봉투들도, 동네 사람들이 주는 잔반만을 찾아 어슬렁대던 길고양이들도 없다. 밤마다 낡은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나던 성당은 리모델링되었고, 골목 초입에 있던 교회 자리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때때로 비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오던 소독차와 생선 트럭 대신 깔끔한 중형차들이 돌아다닌다. 그렇게 낡은 모든 것들이 새것들로 ‘탈바꿈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그 골목에서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들이 진정 ‘낡은 것’들 뿐이라면, 그리 서운해야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근데 그 ‘낡은 것’들 중엔, 없어지지 않았어야 할 것들도 있었던 것만 같아 나를 서글프게 한다. 그리고 그중엔 사람 냄새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젠 아무도 그 골목 한 귀퉁이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지나가며 누군가에게 인사를 할 일도 없고, 근본 없이 떠돌아다니는 낭만 여행꾼에게 먹다 남은 생선을 줄 일도 없다. 편의점에 들어가 외상이야기라도 했다간 건너편 파출소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요 근래 지나다니다 보면 부쩍 그 골목처럼 ‘탈바꿈에 성공’한 골목들을 많이 보게 된다. 당장 내가 다닌 고등학교 근처였던 서울숲 인근 골목들은 서울에서 손가락 안에 꼽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온갖 다양한 컨셉의 ‘감성’ 카페부터, 이젠 영어 내지는 쉼표를 붙여주지 않으면 서운한 간판을 내건 식당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품샵까지. 서로서로 젊은이들의 오감을 사로잡기 위해 요염을 부린다. 끼가 부족한 가게는 골목에서 금방 퇴출되고 이내 다른 매력으로 무장한 가게가 들어선다.
그런 골목들을 지나갈 때면, 나는 공연히 심술을 부려본다. 내 머릿속에서 그 상점들과 오피스텔들을 지워보는 것이다. 상점들과 오피스텔이 증발한 그 자리엔 투박한 주택들과 구멍가게들이 다시 들어선다. 그리고 나는 집과 가게들의 조그만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형광등 빛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춰본다. 숙제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부모님께 혼나는 아이, 화투를 치러 모이신 동네 어르신들, 그리고 가게 한 귀퉁이에 먼지가 쌓인 채로 방치된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박스들. 화려하게 ‘탈바꿈’한 모습 이전에 숨겨져 있던 사람들과 삶의 흔적들을 떠올리면 이내 심술이 달래진다.
모두가 골목들의 옛 모습을 추억하고 그리워하진 않으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아니, 나 같은 못된 심술을 부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나의 ‘골목에 관한 묵상’들은 편협한 반감에 사로잡힌 결과인지도 모른다. ‘핫플레이스’에 생긴 카페에 놀러 온 연인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새로 단장한 오피스텔 안에서는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청년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골목들도 옛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인상을 뚜렷이 받는다. 사람도, 건물도 더 많아졌지만 왠지 춥고 쓸쓸하다고 하소연하는 것만 같다. 때로는 너무 바빠진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도 같다. 내가 살던 그 골목도, 서울숲의 골목도, 그리고 밖에 새 주인을 맞은 또 다른 골목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