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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동윤 Nov 10. 2024

할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드리며


“니 할아버지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무미건조한 카카오톡 메시지 뒤로 두려움과 떨림이 묻어나왔다. 순간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두통을 호소하시던 할아버지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모양이었다. 내 낯빛이 어두워지자 카페에서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여자친구는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고서, 잠시 양해를 구하고 엄마와 짧게 통화를 했다. 할아버지의 상태를 전해들은 뒤, 다음날 병원에 들르기로 하고서 나는 마저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병원에서 본 할아버지의 모습은 한마디로 산송장이었다. 37kg 밖에 나가지 않는 몸 곳곳에는 주사바늘이 힘겹게 매달려 있었고, 피부는 다 썩은 동물의 가죽처럼 늘어져 뼈를 간신히 덮고 있었다. 틀니를 끼지 못한 입은 안으로 잔뜩 말려있었고, 대상포진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얼굴은 이미 붉은 수포로 너저분해진 상태였다. 초점을 잃은 채 이따금씩 움직이는 왼쪽 눈알만이 아직 이 노구의 생명이 꺼지지 않았음을 내게 일러주었다. “할아버지 손자 왔어요. 나 누군지 알겠어?”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말을 몇 마디 붙여보았다.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희미하게 “동윤이...”라는 답이 들려왔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지금 많이 힘든 상황이지만, 생명을 걱정할 단계는 아직 아니라며 안심시켜주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이내 걱정이 몰려왔다. 수술이나 폐렴 등으로 입원 신세가 되어 받아보기만 해봤지 다른 누군가를 간호해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랑 교대하며 간단하게 밥 먹어야하는 시간대나 약 종류 등을 전해 들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할아버지 뒤처리를 내가 도와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싫은 걸 떠나서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혼자 대소변을 가릴 힘이 없어 할아버지는 오줌주머니와 기저귀를 하고 있었다. 밤에 삼촌이 오시기 전까지 내가 해야 할 임무는 바로 그 오줌주머니와 기저귀를 가는 일이었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나는 마음의 다짐을 하고 비닐장갑을 끼고 기저귀를 열어젖혔다. 열어젖히자마자 나는 익숙한 악취는 내가 갈아줄 타이밍을 잘 맞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보아하니 드신 게 없어 딱딱한 고체는 아니고, 액체 형태의 소위 말하는 ‘물똥’이었다. 막상 보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견딜만했다. 행여 할아버지 몸에 묻힐라 조심스레 기저귀를 풀고는 오물실로 재빠르게 가져가 버렸다.  


 기저귀를 갈아드린 뒤, 이제는 또 오줌주머니를 갈아야할 차례였다. 비록 ‘큰 산’은 넘겼다 하더라도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평소 덤벙거림이 유난히 심했던 나였기에 혹시라도 쏟아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의 노심초사를 하며 오줌주머니의 마개를 열어 오줌통에다 옮겨 붇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한 방울의 유출(?)도 없이 무사히 따라 부었다. 그리고는 마찬가지로 오물실로 가 오물통에 부어 처리했다. 두 번의 처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간호사를 불러 기저귀를 갈아드렸다. 

 



 새 기저귀를 찬 채 조용히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보자니, 그래도 손자 노릇해서 뿌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이윽고 ‘뿌듯함’과는 사뭇 다른 결의 생각이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에 대한 ‘연민’ 따위는 아니었다. 아니, 그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보인 것은 ‘나의 할아버지’가 아닌, 그저 생명활동만 처연하게 남은 것 같은 쇠한 몸뚱아리였다. 의식은 흐리멍덩해지고 기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건만, 개의치 않고 생명활동의 지저분한 부산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육신이었다.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나는 괜스레 비위가 상했다. 그 부산물들을 내가 처리해야 했다는 사실보다도, 이렇게 쇠해서도 계속 오물들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인간의 육신 자체에 대한 회의와 경멸이 들었기 때문이다.

 

 육신에 대한 이 같은 ‘경멸’은 종교적 심성을 가진 사람에게 흔히 찾아오나 보다. 사도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하고 말했는가 하면, 법구경은 “머지않아 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 것이다.” 라며 육체의 비극적 종말을 강조하기도 한다. 불교의 사촌이라 할 수 있는 힌두교의 성전 『우파니샤드』에서도 육체는 “항상 죽음에 붙잡혀” 있으며, 육체가 있는 한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초월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등 육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종교적 수행을 ‘몸이 내가 아님을 깨닫기 위한 처절한 몸짓’으로 정의하는 시선도 있을 정도니, 이쯤 되면 말 다했다. 

 

 한창 종교학 공부를 하며 접한 이런저런 구절들과 사상들을 떠올리며 나름의 ‘부정관’ 명상에 몰두해 있을 찰나, 불현 듯 내 육신이 죽비처럼 신호를 보냈다. 맞다. 좀 전에 할아버지의 육신이 만들어낸 것과 똑같은 ‘부산물’들을 처리하라는, 바로 그 신호였다. 마치 나만은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의 육신을 나와는 무관한 ‘대상’으로서 관조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질적 차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냉엄히 알려주는 그 신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옮겨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아 근심을 덜면서(解憂) 나는 내 육신이 생명활동의 부산물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것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쪼르륵...” 하는 하찮은 소리를 통해 그것들은 나 또한 육신을 가진 제한적인 존재임을 사무치게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경멸을 하든지 말든지 간에, 나는 평생을 생명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섭취하고 배설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죽비’를 맞은 나는 이내 숙연해졌다. 좀 전에 품었던 경멸이 부질없는 것일뿐더러, 오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럽게만 느껴지는 그 ‘부산물’들이 창조주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들은 신이 인간에게 “네 꼴은 이러하니라.” 하고 빈부귀천과 관계없이 겸손하라고 알려주는 계시가 아닐까. 또, 그럼으로써 빈부와 귀천을 끊임없이 나누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낫다고 느끼면 생기는 그 알량한 우월감이라는 질병에 내리는 특효약은 아닐까.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내 육신이 처한 부정(不淨)한 운명을 조금은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뒤처리를 잘 해드렸던 것인지, 할아버지는 내가 있는 동안 새근새근 아이처럼 주무셨다.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삼촌이 오실 시간이 되었다. 누구보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신 삼촌은 정확히 약속하셨던 시간에 오셨고, 할아버지의 상태에 대한 간단한 얘기를 나눈 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늦은 시간이라 승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 고요를 기회 삼아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내 코를 통해 드나드는 호흡과 심장 박동 소리 등 내 생명의 징표들을 조용히 느껴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거두실 땐 거두시더라도, 내 목적을 다하기 전까진 거두지 마소서. 그리고 당신이 언젠가 거두신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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