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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동윤 Feb 26. 2024

미니멀 라이프의 계시

 

 얼마 전, 나는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작 <월든>을 구매해 읽었다. 평소 초월주의 사상에 관심이 있었기에 랄프 왈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의 사상가를 찾아보다 알게 된 책이었다. <월든>은 소로가 20대 후반에 약 2년 반 정도에 걸쳐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수에서 숲속 생활을 하며 기록한 일종의 명상록이다. 소로는 물질문명과 세속을 등진 채 자연을 가까이하며 독서와 명상을 통해 삶의 껍데기를 버리고, 본질로 돌파해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 손수 나무를 해 집을 짓고, 옥수수와 감자 등을 재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책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한 마디로 ‘무소유의 삶’, 그리고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충만과 본질의 회복이다. 소로에게는 물질문명의 탐욕과 번잡함은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조차 ‘삶이 아닌 것’이었다. 인간에 의해 의도적이고, 또 우연히 생겨난 모든 ‘유위’들을 소로는 ‘비본질’ 내지는 ‘삶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그에게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문명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본질로의 ‘복귀’였다. 소로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은 법정 스님이 출가를 ‘돌아옴’이라 표현한 것은 같은 맥락이리라.      


 반면, 비본질의 파도에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로서는 이 고매한 이상을 바로 좇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마치 독수리를 보는 닭의 심정이랄까. 하여, ‘독수리는 못 되어도 비둘기는 되어 보자’ 마음을 먹고 당장 실천을 다짐한 것이 있으니 바로 ‘미니멀 라이프’가 되겠다. ‘미니멀 라이프’는 필자뿐 아니라 의식 있는 일부 사람들이 끊임없는 소비와 상품의 폭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그리고 의미있는 물건만을 남기고 다른 모든 것들은 미련 없이 정리하는 것이 요지다.     

 

 그렇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간소화 작업에 들어갔다. 가뭄에 콩 나듯 여자친구가 있었을 때 썼던 돗자리부터 켜켜이 쌓인 노트들과 피피티, 그리고 오랫동안 손이 가지 않은 책들까지 근 1년 사이에 손이 닿지 않았던 것들은 과감히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난 방을 보고 있자니 개운한 느낌과 함께 텅 빈 공간이 주는 은은한 충만함이 느껴졌다.      

 

 잠시 빈 공간을 주시하다 불현듯, 나는 방금까지 내가 한 행위의 심오한 의미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뮤즈가 있어, 그가  내게 선물처럼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뮤즈는 ‘정리’는 신에게로 이르는 ‘정도’라는 것을 내게 귀띔해줬다.      

 

 그 순간 나의 의식 속에는 중세 스콜라 신학을 공부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무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신에 대한 사유를 이어나갔던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신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로 ‘단순성’을 이야기한다. 신은 그 자신의 존재와 속성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은 선하고, 편재하며, 영원하다’라고 말할 때 ‘신=선함, 신=편재함, 신=영원함’이라는 것이다. 즉, 존재와 속성 사이의 분열이 없는 것이다. 이에 관해 스콜라 철학자 대 알베르투스는 ‘신은 곧 하나이고 참이며 좋은 것’이며 ‘획득하거나 상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 말했다.      

 

 다소 난해하지만, 이는 우리 인간하고 비교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썩 내켜 하진 않겠지만, ‘존잘’ 연예인의 대명사 차은우를 잠시 초대해보자. 우리가 ‘차은우는 존잘이다.’라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이 곧 ‘차은우=존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잘’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차은우가 가진 여러 속성 중 하나일 뿐이지 차은우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은우 정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신이 ‘단순한’ 존재라면,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은 곧 신적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정리가 단지 불필요한 물건을 버림으로써 물리적인 공간과 편의를 확보하는 행위가 아닌, 자신의 몸가짐을 ‘단순화’ 함으로써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려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몸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의 몸 생활부터 단순화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영혼까지 ‘분열되지 않고 단순한’ 신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 거쳐야 할 첫걸음이라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영혼을 단순화하는 것은 신체를 단순화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영혼의 단순화란 자신의 주의 집중이나 열망이 오로지 하나 – 그것이 신이 되었든, 영적 진리가 되었든, 사회적 이상이 되었든 - 에 헌신하는 상태라 말할 수 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에서 신에게로 이르는 길은 때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속에 ‘신’ 내지는 ‘영적인 그것’ 만을 허락한다. 간디가 행동 지침서로 삼았던 힌두교의 고대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진정으로 영적인 자는 먹고, 자고, 일하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신에게 제사를 바친다는 심정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오로지 ‘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포기 없는 헌신은 없다. 참된 영적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부와 명예는 물론, 일신의 안위, 심지어는 가족이나 배우자까지 포기해야 한다. 이스라엘 신앙의 시조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아들 이사악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따라야 했다는 성경의 일화는 유명하다. 물론, 나는 당장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용감하게 대학원 진학을 택했지만,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깜깜한 길을 마주한 내 의식의 입자는 사분오열되어 있다. 공부하면서도 머릿속은 플랜B부터 Z까지에 대한 생각으로 ‘분열되어 있다.’ 사회의 안정적 일원으로서 머물고 싶다는 마음도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돈을 잘 벌어서 예쁜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도 나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뮤즈를 믿어보고자 한다.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눈에 보이지 않은 강렬한 그 무엇 말이다. 그리고 그 무엇에 집중하기 위해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오늘 무엇을 내 마음에서 덜어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그 답을 실천에 옮겨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도 만일, 그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면 이 ‘단순화’ 작업의 고됨을 그와 함께 나누고 싶다. 혹시 아는가, 함께 나눈다면 작업이 좀 더 빨라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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