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동윤 Feb 28. 2024

<사회칼럼> ‘자유’가 ‘하늘’을 넘봐서야 되겠는가.

"자유로는 생명을 해칠 수 없다"


 곳곳이 신음소리다. 전공의들을 비롯해 의사들이 병원을 비운 이래로 수술이나 응급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론’과 의협의 ‘의사 배분론’은 여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29일까지 병원으로 의사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면허 정지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 계속해서 놓고 있고, 의협은 이에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로 맞서고 있다. 분명 정부의 태도는 지나치게 강경하고 또 증원 폭도 급격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병원을 떠날 권리는 없다.

     

 병원을 떠난 의사들의 입에서는 ‘자유’가 외쳐진다. 생명을 지킨다는 숭고한 직업의식 이전에 의사들도 ‘노동자’이기에 파업을 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 자신의 직업이 국민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특수성을 외면한 무책임한 외침이다. 다른 노동자들과 달리 이들의 ‘파업할 권리’는 일반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적 권리로 자연적 권리를 박탈하는 상황인 것이다.       


 굳이 복잡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지 않더라도, 자연적 권리가 사회적 권리에 우선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자연적 권리는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퀴나스의 자연적 권리는 ‘신’이라는 형이상학적 대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러한 논리를 이 사안에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에서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인권을 말하듯, 중요한 것은 자연적 권리가 신에 의존하느냐 아니냐가 아닌 사회적 권리를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의대 정원을 ‘증원’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의사들을 ‘배분’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의협의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의학 관련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은 역시 ‘아니오.’이다.      


 무엇보다 그 답을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의사집단이 가지는 ‘소수성’으로 인해 그들의 단체 행동이 의료체계에 더욱 타격을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의사들의 숫자가 충분히 많았다면, (비교적) 소수의 행동에 의료체계 전체가 흔들릴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이러한 ‘힘의 불균형’ 문제는 ‘배분’의 문제가 아닌 ‘절대적 인원’의 문제라고 봄이 옳다.      


 물론, 배분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대 정원을 증원한다 하더라도 적절한 조치나 제도적 개선이 없다면 여전히 의사들은 이른바 ‘피안성’의 ‘피안’으로 도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절대적 공급량 증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과 수도권의 의사가 과포화 상태라면 ‘시장의 논리’에 의해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곳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직업의 자유’를 말하는 그들이 ‘시장의 자유’는 왜 믿지 못하는지 의심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미니멀 라이프의 계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