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저물면 빛은 가장 먼저 등을 보이고 우리는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조용히 어제를 갈무리합니다.
기억은 늘 한발 늦게 당도하고 사랑은 늘 한발 먼저 닳아가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까지 남는 건 사라진 것들의 뒷면에서 아득히 번져오는 오래된 온기였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잊는다는 건 기억을 지우개로 문지르는 일이 아니라 먼지 내려앉은 창가에 새로운 화분 하나를 들여놓는 일이었습니다.
한때 너로 가득 차 숨이 가쁘던 방, 그 빽빽했던 계절이 지나가고 이제는 나 혼자 숨 쉬어도 폐부가 서늘하지 않은 아침. 너를 덜어낸 무게만큼 나는 비로소 나를 채웁니다.
슬픔의 밑바닥에 유통기한이 적혀 있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안심하고 울 수 있었을까요. 긴 장마 같던 마음을 널어 말리고 축축했던 기억의 끝단이 바삭하게 마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너를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온전한 언어를 얻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은 먹었니' 묻던 너의 다정함처럼, 이제 나는 식은 커피를 데우러 부엌으로 가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들고 나의 안부를 묻기로 합니다.
어떤 잊음은 가장 선명한 기억법이 되기도 하여 우리가 나눈 계절은 지나갔지만 그때의 날씨는 살갗에 남아 가끔 비가 오기 전 무릎처럼 욱신거리는 그리움이 되겠지요.
서로를 잊게 될 거라는 예언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잊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없는 풍경에 익숙해지는 중이니까요. 서로의 이름을 흐릿하게 지워갈 테지만 그건 상실이 아니라 헤아림의 또 다른 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내일은 맑을 것입니다. 설령 비가 온다 해도 나는 빗소리를 음표 삼아 읽는 법을 배웠으니 현관에 놓인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혼자 걷는 걸음마다 나만의 단단한 문장을 피워낼 것입니다.
빛이 남기고 간 잔열이 손끝에 오래 머물 듯 내 안에도 유효기간 없는 감정 하나쯤은 아직 따뜻하게 살아 있을 거라 믿으며,
나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않고 열어두기로 합니다. 바람이 불어와 멋대로 페이지를 넘기더라도 그곳엔 여전히, 내가 서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마지막 장도 끝이 아니라 당신에게 남아 있는 가장 조용한 서문(序文)으로 남기를.
당신은 부디, 안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