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잊는다는 것
숫자 너머, 흘러가는 것들에 대한 조용한 애도
누군가 불쑥 나이를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는 척한 것이 아니다. 정말로, 잠시, 내가 몇 살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올해가 몇 년이더라. 내가 몇 년생이었지. 생일이 지났던가. 그 몇 초의 공백 속에서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정말로, 내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 숫자가 나와 무슨 상관인지를 잠시 잊어버린 것이다. 마치 오래전에 이사 간 집 주소처럼, 한때는 매일 말하던 것이 어느 순간 낯설어져 버린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나를 잃어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나'라는 건 이렇게 흐릿한 것이었을까.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몇 바퀴 돌았는지를 세어, 한 인간의 존재를 숫자로 압축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숫자가 아니다.
서른다섯이라는 숫자는 누군가에게는 첫 아이를 품에 안은 해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랜 꿈을 포기한 해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비로소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해이다. 같은 숫자 안에 전혀 다른 우주가 담겨 있다.
마흔이라는 숫자 앞에서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비로소 피어난다. 쉰이라는 숫자가 누군가에게는 체념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유이다. 숫자는 우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시간의 눈금일 뿐, 그 눈금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OO년생"이라는 표현을 택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몇 살짜리 인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를 통과해 온 존재라는 선언. 88년생은 IMF의 그늘 아래 청소년기를 보냈고, 97년생은 스마트폰과 함께 성인이 되었다. 년생이라는 표현 속에는 개인이 어떤 역사적 지층 위에 서 있는지가 담긴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빨라지는 걸까
어린 시절, 여름방학은 영원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거대한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매미 소리를 들으며 만화책을 읽고, 동네 골목을 뛰어다니고, 해가 질 때까지 놀아도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시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렀다. 마치 우리를 기다려주기라도 하듯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눈을 떴는데 벌써 점심이고, 정신을 차리면 금요일이고, 고개를 들면 또 한 해가 저물어 있다. 분명히 이십 대였는데 서른이 되었고, 서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다섯이 되었다.
신경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뇌는 새로운 경험을 할 때 시간을 길게 느끼고, 익숙한 일상이 반복될 때 시간을 압축한다고.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본 바다, 처음 탄 자전거, 처음 느낀 두근거림. 뇌는 그 모든 '처음'들을 선명하게 새겼고, 그래서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처음'은 줄어든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이번 달은 지난달과 닮았다. 해마는 30대부터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하고, 뇌는 더 이상 매 순간을 개별적으로 저장하지 않는다. 비슷한 기억들은 하나로 뭉쳐지고, 일 년이 일주일처럼 사라진다.
우리가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지?"라고 탄식할 때, 그것은 감상이 아니다. 정말로, 물리적으로, 우리의 뇌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창고가 작아지고, 숫자는 희미해지며, 남는 것은 흐릿한 계절의 감각뿐.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다가 멈췄다.
낯선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있었고, 입꼬리가 처져 있었고, 피부는 예전의 탄력을 잃어버렸다. '이게 나야?'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나는 여전히 스물다섯쯤 되는 것 같은데, 거울 속의 나는 분명히 달랐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주관적 연령'과 '객관적 연령'의 괴리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성인은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젊다고 느낀다. 마음속의 나는 언제나 한참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거울은, 사진은, 타인의 시선은 계속해서 현실을 들이민다. "넌 더 이상 그때의 네가 아니야."
나는 가끔 옛날 사진을 꺼내본다. 까르르 웃고 있는 스물세 살의 나. 졸업식 날 환하게 웃던 나. 첫 직장에서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나. 그 사람들은 모두 나인데, 동시에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불교에서는 묻는다. 오늘의 나와 십 년 전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매 순간 세포는 죽고 새로 태어나며, 생각은 변하고, 감정은 흘러간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있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뿐이다.
그렇다면 나이란, 대체 무엇에 붙은 숫자란 말인가.
이 질문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더 깊은 상실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나는 계속 변하고 있고, 예전의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걷는 존재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고 불렀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해 걸어간다. 평소에는 그 사실을 잊고 살지만, 나이를 묻는 질문이 불현듯 그것을 상기시킨다. 숫자가 커질수록 종착역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본래적 실존'이란 이 유한성을 직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삶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에 매몰되어 죽음을 망각하며 산다. 그러다 불현듯 나이를 자각하는 순간, 그 망각의 껍질이 벗겨지며 불안이 스며든다.
장 폴 사르트르는 더 날카롭게 말한다. "인간은 자유로 선고받은 존재"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하며, 그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이상 "나중에"라는 도피처가 없다는 것이다. 스무 살에는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성은 무한했고,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가능성의 문이 하나씩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가지 않은 길은 영영 가지 못한 길이 된다.
지금 이 모습이 내가 만들어온 나이며,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다는 자각. 나이란 자유의 무게이자, 책임의 무게이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었다. 그중 중년기의 과제는 '생산성 대 침체'이며, 노년기의 과제는 '자아통합 대 절망'이다.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 물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심리학자 다니엘 레빈슨은 '인생의 계절'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약 40세를 전후로 '중년의 전환기'를 겪으며, 이 시기에 자신의 유한성을 처음으로 실감한다. 더 이상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길들이 영원히 닫혀버린 존재라는 자각. 이것이 중년의 위기이며, 이 위기는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우리를 침식한다.
나이를 묻는 질문이 불편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라는 실존적 심문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등
부모님이 늙어가는 것을 보는 일.
이것이 나이 듦의 가장 잔인한 얼굴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은 산처럼 넓었다. 그 등에 업히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머니의 손은 마법 같았다. 그 손이 이마를 짚으면 열이 내렸고, 그 손이 만든 밥을 먹으면 힘이 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등이 굽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에 주름이 늘고, 힘이 빠졌다. 걸음이 느려지고, 말씀이 어눌해지고, 가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신다.
그때 깨달았다. 아, 영원한 것은 없구나. 저 단단해 보이던 것들도 결국은 무너지는구나.
부모님의 노화를 목격하는 것은 나 자신의 미래를 미리 보는 것과 같다. 저 굽은 등이 언젠가 나의 등이 될 것이고, 저 떨리는 손이 언젠가 나의 손이 될 것이다. 우리는 부모님 안에서 자신의 유한함을 마주한다.
나이를 잊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이 잔인한 진실을 잠시라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범죄심리학은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나이'는 종종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일본에서는 '무연사회(無縁社会)'라는 말이 있다. 연결이 끊어진 사회. 가족도, 친구도, 사회적 역할도 잃어버린 노인들이 스스로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느끼게 되는 사회.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이 느낌은 육체적 죽음보다 먼저 찾아오는 또 다른 죽음이다. 사회적 죽음, 존재론적 죽음.
심리학자들은 '시간적 자기 연속성의 단절'을 말한다. 미래의 나를 현재의 나와 연결하지 못할 때, 인간은 방향을 잃는다. 나이를 잊는다는 것, 혹은 나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때로 자기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에서 점점 투명해진다는 것일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존재 자체만으로 눈에 띄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 회의실에서,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나는 점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공자의 탄식, 노자의 물
2500년 전, 공자는 강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구나.
그 짧은 탄식 속에 인생의 모든 슬픔이 담겨 있다.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우리는 그저 강둑에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볼 뿐이다. 잡을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노자는 달랐다. 그는 물처럼 살라 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다투지 않는다. 어떤 그릇에도 자신을 맞춘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그렇게 결국 바다에 이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 거슬러 오르려 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모든 것과 싸웠다. 시간과, 세상과, 한계와.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는다. 강물은 거슬러 오를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 그것은 체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후에야 찾아오는 가벼움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아야 하는가. 젊음을, 가능성을, 사랑했던 것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놓아줌은 아름답지만, 그 과정은 처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이 듦은 슬프다.
아무리 철학이 의미를 부여해도, 아무리 과학이 메커니즘을 설명해도, 아무리 지혜로운 말씀이 위로를 건네도. 젊음이 떠나가는 것은 슬프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슬프고, 사랑하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은 슬프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 서글프면 서글픈 대로 느껴도 된다. 나이 듦 앞에서 초연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 그 슬픔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내일도 해는 뜨고, 밥은 먹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아야 한다. 슬픔을 안고서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품위인지도 모른다.
공자는 강물 앞에서 탄식했지만, 그 후에도 제자들을 가르쳤다. 노자는 무위를 말했지만, 5000자의 글을 남겼다. 그들도 슬펐을 것이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OO년생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이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OO년생이에요."
그것은 계산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나는 몇 살짜리 인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를 통과해 온 존재라는 선언이다. 숫자 하나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어떤 역사적 지층 위에 서 있는지, 어떤 계절들을 건너왔는지. 그 이야기가 숫자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해 준다.
언젠가 나는 내 나이를 완전히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기억이 흐려지고, 시간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늘이 며칠인지 몇 년인지도 알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고, 나는 믿고 싶다.
숫자를 잊어버려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이다. 햇살의 따뜻함을 느끼고, 좋아하는 노래에 흥얼거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것이면 우리는 충분히 살아있는 것이다.
나이란, 결국 우리가 얼마나 오래 버텨왔는지를 증명하는 훈장 같은 것이다.
그 훈장이 무거워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고개를 숙이게 되지만,
그 무게를 견뎌온 어깨는 분명히 예전보다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이 나이를 물어오면,
나는 아마 잠시 멈출 것이다.
그 몇 초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건너온 모든 계절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대답할 것이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것은 슬픈 대답이 아니다.
그냥, 인간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