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은 언제나 사후에 온다.
살아가는 순간에는 그저 혼란스럽고 막막하기만 한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 싶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것을 통찰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마치 인생의 문제를 풀어낸 것처럼. 하지만 정작 그 통찰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해석일 뿐, 앞으로 올 삶에는 별 쓸모가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또다시 '이번에는 깨달았다'라고 착각한다.
통찰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피곤해진다. SNS에는 넘쳐난다. 새벽 감성에 취해 '진짜 나를 찾았다'는 사람들, 여행을 다녀와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사람들, 책 한 권 읽고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는 사람들. 그들의 통찰은 대부분 일주일을 못 간다. 다음 주가 되면 또 다른 통찰을 찾아 헤맨다. 통찰이 유행처럼 소비되는 시대다. 깊이 있게 사유하기보다는, 그럴듯한 문장 하나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급급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척했고, 일기장에 철학자처럼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존재의 의미', '관계의 본질', '진정한 나' 같은 거창한 단어들로 내 공허함을 가렸다. 하지만 그 일기를 몇 달 뒤 다시 읽으면 부끄러워진다. 저건 통찰이 아니라 그저 감정의 배설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쓰는 순간만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을 뿐이다.
진짜 통찰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통찰이 아니게 된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건 이미 그것이 개념으로 고정되었다는 뜻이고, 개념이 된 순간 살아있는 사유는 죽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조차 억지로 말하려 든다. 그게 통찰인 양 포장해서 타인에게 보여주려 한다. 좋아요를 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혹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끼기 위해.
비평가들은 더 심하다. 그들은 타인의 삶을 관찰하며 통찰을 생산한다. "현대인은 소외되어 있다", "우리는 관계의 피로를 겪고 있다", "이 시대는 의미를 잃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 진단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가. 아니다. 그저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음 날이면 똑같은 삶을 산다. 비평은 세상을 해석할 뿐 변화시키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뭐라 했던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찰은 무용한가. 그렇게 말하기도 애매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찰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무의미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에 이름을 붙이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착각이든 허영이든,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통찰이라는 환상 덕분에 우리는 삶을 견딘다. 내가 겪은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내 선택이 옳았다고, 내 삶이 가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문제는 그 통찰을 절대화하는 데 있다. 한 번의 깨달음이 영원한 진리인 양 착각하는 것. 자신의 경험을 보편화해서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나는 이렇게 살아서 행복해졌으니 너도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식의 오만함. 진짜 통찰은 겸손하다. 자신이 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자기 생각조차 의심할 줄 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회의를 의미한다. 내가 아는 게 얼마나 좁고 편협한 지 깨닫는 것이 진짜 앎의 시작이다.
요즘 나는 통찰을 불신한다. 내가 쓴 문장들도, 내가 품은 생각들도 결국 한때의 감정일 뿐이라는 걸 안다. 오늘 확신했던 것이 내일은 우스워 보일 수 있고,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중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깨달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렇게 느낀다'고만 말한다. 통찰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긴다. 언젠가 다시 읽었을 때 부끄러워하기 위해.
진짜 비평은 타인을 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향한다. 내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얼마나 위선적인지, 얼마나 나약한지 가차 없이 들여다보는 것. 그 잔인한 시선을 견디는 사람만이 진짜 통찰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그런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비평하고, 세상을 비평하고, 시대를 비평한다. 나를 보지 않기 위해.
결국 통찰이라는 건 허영이다. 하지만 그 허영 없이 우리는 살 수 없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인간이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믿는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가 바로 이것이다. 시지프스는 돌을 굴린다. 다시 굴러 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통찰을 찾는다. 그것이 일시적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