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방울이 내린 자리에
[순간의 시상]
햇살이 투명한 수액 팩을 통과하면, 그 안에는 작은 미끄럼틀이 열린다. 동그란 기포들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레진 공예 속에 은은한 펄을 가득 풀어놓은 것처럼 영롱하다. 1초에 한 번, "또르르" 소리를 낼 것만 같은 귀여운 수액 방울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듯 정직한 리듬으로 발을 맞추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작은 여행자들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길은 꽤나 개구쟁이 같다. 어른이라기엔 서툴고 아이라기엔 너무 커버린, 그 애매한 20대의 문턱에서 아픔을 참아온 탓일까. 과로로 지쳐 잔뜩 웅크린 혈관은 성난 지도처럼 구불구불하게 꼬여 있어, 처음 온 바늘 손님을 쉽게 반겨주지 않는다. "혈관이 부끄러움이 많은지 쏙 숨어버렸네요." 간호사님의 다정한 농담 섞인 한마디 뒤에 몇 번의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바늘이 길을 찾아 헤매는 찌릿한 통증은 잠시뿐, 이내 길을 찾은 투명한 펄 구슬들이 퐁당퐁당 내 몸 안으로 뛰어든다.
가장 먼저 감각이 닿는 곳은 날카로운 금속 바늘이 머무는 그 자리다. 온몸에서 그곳이 가장 차갑다. 얼음장 같은 액체가 심장을 향해 출발하는 그 첫 관문은 서늘하다 못해 시릴 정도다. 하지만 그 서늘한 통증 뒤로 기분 좋은 시원함이 차오른다. 마치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입이 아닌 '눈으로' 직접 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이 섞인 듯 영롱한 액체가 시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갈 때면, 침침했던 시야가 맑아지며 바싹 말라 있던 장기들이 "아, 시원해!" 하고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다.
바늘을 뽑고 난 자리엔 작은 캐릭터가 그려진 동그란 스티커 하나가 붙는다. 아픈 곳을 가려주는 그 작은 종이 조각이, 마치 서툰 어른 노릇을 하느라 고생했다며 토닥여주는 칭찬 스티커처럼 느껴진다. 나는 지금 조그만 생기를 되찾는 이 몽글몽글한 치유의 시간에 잠겨 있다.
사회는 이제 막 첫발을 뗀 20대 청년들에게 가혹한 이중 잣대를 들이댑니다. 한쪽에서는 성인이니 경제적으로 독립하라며 등을 떠밀고, 다른 한쪽에서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결혼과 출산을 고민하라며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딛고 서야 할 경제적 토양은 유례없이 척박합니다. 고물가와 고금리, 그리고 주거비의 폭등은 청년들에게 독립을 생존의 결단으로, 결혼을 도박에 가까운 선택으로 만들었습니다.
검증된 사실에 근거하자면, 현재 청년층이 마주한 자산 형성의 불가능은 개인의 게으름이 아닌 구조적 한계에서 기인합니다. 실질 임금의 상승폭이 자산 가격의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청년들은 조직 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할부로 결제하며 버팁니다. 몸이 아픈 상태임에도 업무 효율이 떨어지면서까지 자리를 지키는 '프레젠티즘(Presenteeism)' 현상은 고용 불안정성과 맞물려 청년층을 더욱 깊은 과로의 늪으로 밀어 넣습니다.
특히 기만적인 부분은 국가와 사회의 태도입니다. 제도는 워라밸을 권장하고 저출산 대책을 쏟아내며 겉모양을 갖추려 애쓰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여전히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구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유급 병가'가 법적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점은, 경제적 기반이 약한 청년들에게 아픔은 곧 소득의 상실이라는 공포를 주입합니다. 나라꼴과 경제가 이토록 불안정한데, 개인에게만 어른의 책임감을 요구하며 링거 투혼을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시스템의 설계 결함입니다.
기계조차 과부하가 걸리면 정비를 위해 가동을 멈춥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수액이라는 보조 수단으로 청년들을 억지로 세워두고는 그것을 패기라 부릅니다. 겉모양만 완성된 휴식 제도와 현실의 괴리는, 미래를 설계해야 할 청년들이 병실에서 강제 리부팅을 반복하게 만드는 비극을 낳습니다.
머리 위에서 몽글몽글 빛나며 떨어지는 수액 방울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나를 살리는 생명수입니까, 아니면 나를 다시 불안한 전장으로 내몰기 위한 임시방편의 연료입니까. 이제는 젊음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청년들의 비명에 대해, 우리 사회가 겉치레가 아닌 진심 어린 예의와 실질적인 경제적 대안으로 답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