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점에서 사색의 절반을 지나며

by 슈펭 Super Peng

반환점에서 사색의 절반을 지나며

1. 스무 번째 문장 앞에서
오늘로 스무 번째 글을 쓴다.
처음 이 브런치북을 시작할 때는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한 편, 두 편 쓰다 보면 금세 할 말이 바닥날 줄 알았다. 세상에 대해, 관계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쓰면 쓸수록 생각이 늘어났다. 하나를 꺼내면 그 뒤에 숨어 있던 두 개가 고개를 내밀었고, 그 두 개를 붙잡으면 또 다른 것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사색은 바닥이 없는 우물 같았다.
두레박을 내릴 때마다 물이 올라왔다. 때로는 맑은 물이, 때로는 흙탕물이, 때로는 내가 던져 넣은 줄도 몰랐던 것들이 딸려 올라왔다. 아직 서른 편 중 스무 편. 삼분의 이를 지났을 뿐인데 벌써 지쳐버린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겨우 워밍업을 끝낸 것 같기도 하다.

마라톤으로 치면 반환점을 돈 셈이다. 출발선의 흥분은 사라졌고, 결승선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가장 외로운 구간. 그래서 오늘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려 한다. 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걷고 있는지.

처음에는 세상이 보였다

1화는 W 유방암 인식 개선이었다
선의로 시작된 캠페인이 어떻게 불쾌함과 논쟁으로 변질되는지를 지켜봤다. 좋은 의도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선의에도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 그 글을 쓰면서 나는 세상을 향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서로의 선의마저 의심하게 되었을까?"

이어서 국회의원들의 스펙터클을 다뤘다. 회사값을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았고, 자본이 만들어낸 불공정의 시계를 분석했다. 초록색 가면 뒤에 숨은 고독을 들여다봤고, 어른의 세계에서 만난 무임승차자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때의 나는 비평가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현실을 해부하는 것. 그것이 사색하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글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쯤 품는 그 순진한 믿음 말이다.

그다음에는 관계가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화살이 방향을 틀었다.
세상을 향하던 시선이 슬그머니 관계로, 그리고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6화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면"을 쓸 때였다. 처음에는 현대 사회의 관계 피로를 비판하는 글을 쓰려고 했다. SNS가 관계를 소비재로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친밀함마저 상품화했다, 그런 익숙한 비평 말이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이상했다. 비판의 대상이 자꾸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겹쳤다. 관계를 효율로 계산하는 것, 에너지 대비 성과를 따지는 것, 피곤하면 쉽게 차단 버튼을 누르는 것. 그것은 사회의 문제이기 전에 나의 문제였다.

힐링 산업을 비판하면서 나도 그 산업의 소비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과잉 연결 시대를 개탄하면서 나 역시 스마트폰 없이는 불안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했다. 너무 가까워져서 멀어진 마음들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먼저 거리를 둔 관계들이 떠올랐다.

비평가의 자리는 편하다. 문제의 바깥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면 된다. 그러나 그 자리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사색의 성격이 바뀌었다. 더 이상 세상을 재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 세상의 일부였으니까.
결국에는 나 자신이 남았다

8화 "나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지각'되는가"를 쓰면서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존재와 인식의 문제. 철학에서는 수천 년 동안 논쟁해 온 주제다. 그러나 내게는 이론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였다. SNS에 글을 올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우리. "내가 나라고 느끼는 이것은 진짜 나인가, 아니면 타인의 기대가 만들어낸 허상인가?"

19화에서는 나이에 대해 썼다.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무게. 스물아홉이라는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이력서에 적히는 생년월일과 실제로 내가 살아온 시간 사이의 간극.

이 글들을 쓰면서 나는 계속 허물을 벗었다. 사회 비평가의 허물, 관계 전문가의 허물, 현명한 조언자의 허물. 벗고 또 벗었더니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한 사람만 남았다. 질문만 잔뜩 가지고 있고, 답은 하나도 없는 사람. 불안하고, 외롭고, 종종 길을 잃는 사람.

이상하게도 그 상태가 가장 정직하게 느껴졌다.


왜 계속 쓰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누가 이 글을 읽을까?

브런치 알고리즘은 자극적인 제목과 짧은 글을 선호한다. '3분 만에 읽는 성공 비결', '당장 써먹는 관계의 기술' 같은 것들. 그런데 나는 답도 없고, 결론도 애매하고, 읽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는 글을 쓰고 있다. 효율의 시대에 가장 비효율적인 콘텐츠.

그런데도 계속 쓴다. 왜?

처음에는 기록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두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서. 그다음에는 정리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뒤엉킨 실타래를 글로 풀어내면 조금은 명확해질 것 같아서.

그러나 스무 편을 쓴 지금, 다른 이유를 발견했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안 알림은 의미를 잃고, 할 일 목록은 잠시 잊히고, 빠르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멈춘다. 한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그 느린 과정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 사색은 나의 호흡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글을 쓰면서 비로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기 생각을 모른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소용돌이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글로 옮기는 순간, 흐릿했던 것이 선명해진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글쓰기는 자기 발견의 도구다.

어쩌면 이 브런치북은 독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거울인지도 모른다.


아직 묻지 않은 질문들

스무 편을 쓰면서 많은 것을 물었지만, 아직 건드리지 못한 것들이 남았다.

시간에 대해.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을 모른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왜곡되고, 미래는 불안 속에서 과장된다. 현재만이 진짜라고들 하지만, 그 현재라는 것은 잡으려 하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어떻게 시간과 화해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9화에서 화장장 갈등을 다루며 잠시 스쳤지만, 정면으로 마주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외면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몸에 대해. 지금까지의 사색은 주로 마음과 생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몸으로 존재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피곤함을 느끼는 것, 누군가를 안고 싶은 것. 사유하는 존재이기 전에 우리는 먼저 느끼는 몸이다. 몸의 언어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해. 관계의 피로, 적당한 거리, 연결과 단절에 대해서는 썼지만, 정작 사랑 자체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가장 흔하게 말해지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사랑은 감정인가, 선택인가, 기술인가?

용서에 대해. 타인을 용서하는 것, 자신을 용서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존재하는가? 용서와 망각의 차이는 무엇인가?

희망에 대해. 비관주의가 지식인의 표식처럼 여겨지는 시대. 희망을 말하면 순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희망 없이 어떻게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절망을 통과한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들이 남은 열 편을 채울 것이다. 혹은 채우지 못하고 또 다른 질문만 남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사색의 가치는 답을 찾는 데 있지 않으니까.


중간 지점의 고백

솔직히 말하면, 지금 막막하다.

스무 편을 쓰면서 뭔가 성장했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무뎌졌다. 관계에 대한 명쾌한 원칙? 흔들린다.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이해? 멀어졌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고,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태가 불쾌하지 않다.

예전에는 확실함을 좋아했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렇게 살면 안 된다. 확실함은 안전했다. 판단의 기준이 있으면 선택이 쉬웠고, 선택이 쉬우면 불안이 줄었다.

그러나 그 확실함이 얼마나 가짜였는지 이제는 안다. 그것은 세상의 복잡성을 외면하고 만들어낸 허구의 질서였다. 실제 삶은 훨씬 더 어지럽고, 모순적이고, 정리되지 않는다.

불확실함 속에서 머무르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의 사색이 내게 준 것이다.


당신에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여기까지 왔는가?

효율적인 콘텐츠는 넘쳐난다. 3분 요약, 핵심만 정리,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글들 사이에서 당신은 왜 이 긴 글을 읽고 있는가? 혹시 당신도 나처럼 느린 속도가 그리웠던 건 아닐까? 답을 주지 않는 질문들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아마 비슷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빠르게 소비되는 정보가 아니라, 천천히 씹어야 맛이 나는 생각. 당장의 해결책이 아니라, 오래 품고 있어야 익는 질문. 그런 것들.

앞으로 열 편이 남았다. 무엇을 쓰게 될지 나도 모른다. 미리 계획한 것도 없다. 그냥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을, 그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을 쓸 것이다.

당신이 계속 읽어줄지도 모른다. 중간에 떠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사색은 혼자 하는 것이니까. 다만 가끔, 서로 다른 곳에서 비슷한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덜 외롭지 않은가?

다시, 걷는다

마라톤 반환점을 돈 주자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른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남은 거리를 가늠하고, 다리의 상태를 점검한다. 그리고 다시 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시 걷는다. 마라톤의 진짜 비결은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했다. 때로는 걷더라도.

나도 다시 걷는다.

서른 편의 글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그러나 결승선이 중요한 게 아니다. 결승선에 도달해도 사색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삶이 계속되는 한 질문도 계속될 것이고, 질문이 계속되는 한 글도 계속될 것이다.

반환점에서 잠시 뒤를 돌아봤다. 이제 다시 앞을 본다.

아직 묻지 않은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21화에서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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