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이 낯설어지는 순간

by 슈펭 Super Peng


매일 걷던 거리였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집 앞 골목. 늘 같은 시간에 켜지는 가로등. 주머니 속에서 짤그랑거리는 열쇠 소리. 삐걱거리는 계단의 세 번째 칸, 페인트가 벗겨진 옆집 대문, 항상 같은 자리에 주차된 흰색 차. 내 세상은 빈틈없이 견고했다. 안전한 반복으로 촘촘히 짜여 있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 주는 편안함. 나는 그 안에서 아무 의심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완벽한 일상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갔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매일 누르던 네 자리 숫자가 갑자기 남의 집 번호처럼 느껴졌다. 1, 2, 3, 4. 이게 맞나? 수천 번은 눌렀을 버튼인데, 손가락이 망설였다. 삐비빅,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낯설었다. 이 소리였나? 원래 이런 소리였나? 신발을 벗고 들어선 거실은 영화 세트장 같았다. 내가 고른 소파, 내가 둔 화분, 내가 켜둔 조명, 내가 건 커튼. 다 내 것인데, 내 것 같지 않았다. 타인의 공간에 불시착한 이방인 같은 기분. 여기가 정말 내가 사는 곳인가. 이 공간이 정말 '나'를 담고 있는가. 갑자기 확신이 없어졌다.

가만 생각해 보니 퇴근길도 그랬다. 회사 문을 나선 건 기억난다. 그런데 그다음은? 횡단보도는 언제 건넜는지, 지하철은 몇 호선을 탔는지, 엘리베이터 버튼은 언제 눌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40분은 걸렸을 길인데, 기억에는 5분도 안 남아 있었다. 몸은 습관대로 움직여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은 어딘가에 두고 온 것처럼 아득했다. 나는 분명 걸었고, 탔고, 눌렀고, 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행위를 '나'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니면 어떤 프로그램이 내 몸을 조종한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생각보다 자주.

세수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거울 속 사람이 내가 아닌 것 같은 순간. 뚫어지게 쳐다볼수록 '내가 정말 이렇게 생겼나?' 싶어진다. 이 눈, 이 코, 이 입. 30년 가까이 달고 다닌 얼굴인데,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 같다. '나'라는 존재가 이 몸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스러워진다. 왜 하필 이 몸인가. 왜 하필 이 얼굴인가. 왜 하필 여기에, 이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났는가. 평소엔 당연했던 것들이 갑자기 이상해진다.

손을 보다가 멈춘 적도 있다.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이 흐르고, 거품이 일고, 손이 접시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이 내 손 같지 않았다. 다섯 개의 손가락, 손톱, 주름, 핏줄. 이게 내 몸의 일부라는 게 이상했다. 이 손이 30년 동안 나와 함께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이 내 팔 끝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몇 초 후 다시 '내 손'이 됐지만, 그 몇 초 동안 느낀 이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단어도 그렇다. 아무 단어나 열 번만 소리 내어 반복해 보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사과. 어느 순간 의미가 증발한다. '사과'가 뭐지? 이게 과일 이름이 맞나? 소리의 껍데기만 남아 윙윙거린다. 분명 아는 단어인데, 모르는 단어가 된다. 익숙함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낯설어진다. 이상한 역설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메뷔(Jamais vu)'라고 부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기시감(Déjà vu)의 반대 개념이다. 기시감이 '처음인데 익숙한 느낌'이라면, 자메뷔는 '익숙한데 처음인 느낌'이다. 매일 걷던 길이 낯설다. 매일 보던 얼굴이 낯설다. 매일 쓰던 단어가 낯설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의 약 60%가 자메뷔를 경험한다. 생각보다 흔하다. 당신만 이상한 게 아니다. 나만 미친 게 아니다.

뇌과학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우리 뇌는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 한다. 생존을 위해 진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효율을 추구한다. 그래서 익숙한 것은 '자동 처리'한다. 매번 새롭게 인식하면 과부하가 걸리니까. 처음 운전을 배울 때를 생각해 보라. 핸들, 액셀, 브레이크, 사이드미러, 방향지시등. 모든 것에 집중해야 했다.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했다. 하지만 몇 년 지나면? 라디오 듣고, 노래 부르고, 생각에 잠기면서도 운전한다. 뇌가 운전을 '자동화'했기 때문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한다.

이것이 일상 전체에 적용된다. 출근길, 양치질, 샤워, 식사, 퇴근길. 뇌가 "이건 알아, 넘어가"라고 판단하면, 우리는 눈을 뜨고도 보지 않게 된다. 실제로 거기 있는데 인식에서 사라진다. 에너지 절약이다. 생존에는 유리하다. 하지만 대가가 있다. 삶이 흐릿해진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일주일이 하루 같고, 한 달이 일주일 같고, 일 년이 한 달 같다. 시간이 빨라진 게 아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자메뷔는 그 자동 처리가 잠깐 멈출 때 일어난다. 뇌가 "어라, 이게 뭐지?"라고 다시 묻는 순간. 신경 회로가 살짝 피로해지거나, 예상과 다른 자극이 들어오거나, 어떤 이유로든 '자동 모드'가 해제된다. 그러면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아 진다. 필터가 벗겨지고, 날것의 현실이 드러난다.

최신 신경과학은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예측한다.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이럴 것이다"라고 예측하고, 그 예측을 현실로 인식한다. 감각 정보는 그 예측을 살짝 수정하는 데만 쓰인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건 현실이 아니라, 뇌가 만든 시뮬레이션이다. 뇌가 그려낸 가상현실이다. 익숙한 것일수록 예측이 강하다. 뇌는 "이건 알아"라면서 감각 정보를 거의 무시한다. 그래서 매일 보는 것일수록 실은 안 본다.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안 보인다. 자메뷔는 그 예측이 잠깐 실패할 때 일어난다. 역설적으로, 그 순간 우리는 '진짜'를 본다. 필터 없이. 예측 없이. 뇌가 만든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실제 현실을. 낯섦이 진짜고, 익숙함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처음엔 당혹스럽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 너무 피로해서 감각이 무뎌진 걸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내가 발 딛고 선 이 견고한 일상이 사실은 얇은 가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 하지만 가만히 그 낯선 공기 속에 서 있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오류'가 아니라, 뇌가 보내는 '잠시 멈춤' 신호가 아닐까.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 아닐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비슷한 것을 주목했다. 그는 우리가 평소에 '잠들어 있다'라고 했다. 매일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하게 반응한다. 자동 조종 모드. 그는 이걸 '일상성(Alltäglichkeit)'이라고 불렀다. 편하다. 안전하다. 하지만 깨어 있지 않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Das Man)'로 산다고. 남들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생각 없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하고, 남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하고, 남들이 사는 대로 산다.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간다. 물에 떠내려가듯이.

그런데 가끔, 그 흐름이 멈춘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예고 없이.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면서. 하이데거는 이 순간을 '불안(Angst)'이라고 불렀다. 공포와는 다르다. 공포는 대상이 있다. 호랑이가 무섭다, 높은 곳이 무섭다, 시험이 무섭다. 하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그냥 뭔가 어긋난 느낌.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데, 뭔가 잘못된 느낌. 세상 전체가 낯설어진 느낌. 이것이 바로 자메뷔가 주는 감정이다. 그는 말했다. 이 순간이야말로 기회라고. '본래적 존재'를 마주할 기회라고. 무슨 말이냐면, 자동 조종 모드에서 벗어나 진짜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한 삶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이 길이 정말 내 길인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나는 정말 보고 있는가? 평소엔 묻지 않는 질문들. 너무 익숙해서 물을 필요가 없었던 질문들. 너무 바빠서 물을 틈이 없었던 질문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로캉탱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밤나무뿌리를 본다. 평범한 나무뿌리다. 수천 번 봤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해진다. 저게 왜 있지? 왜 있어야 하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압도한다. 구역질이 난다. 말 그대로 '구토'가 치민다. 로캉탱이 느낀 건 '존재의 우연성'이다. 모든 것은 그냥 있다. 이유가 없다. 내가 태어난 것도,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이 나무가 여기 있는 것도, 다 우연이다. 필연적인 건 없다. "왜?"라고 물어도 답이 없다. 그냥 있다.

무섭게 들린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여기서 희망을 봤다. 주어진 의미가 없다면, 우리가 만들면 된다. 정해진 길이 없다면, 우리가 선택하면 된다. 그게 자유다. 무거운 자유. 책임이 따르는 자유. 하지만 진짜 자유. 익숙함이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는 이 자유와 마주한다. "원래 그런 거야"가 무너진다. "당연한 거야"가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프로이트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 현상을 봤다. 그는 '언캐니(Unheimlich)'라는 개념을 썼다. 독일어로 'Heim'은 집이다. 'Heimlich'는 집처럼 편안한, 익숙한, 친근한. 'Unheimlich'는 그 반대, 낯설고 불편하고 섬뜩한. 그런데 프로이트의 통찰은 이거다. 가장 섬뜩한 건 완전히 낯선 게 아니다.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가장 섬뜩하다. 공포영화를 생각해 보라. 가장 무서운 건 뭔가? 괴물? 귀신? 아니다. 익숙한 것이 이상해질 때다. 인형이 움직인다. 거울 속 내가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 집이 우리 집 같지 않다. 엄마가 엄마가 아닌 것 같다. 내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다. 왜 이게 무서울까? 프로이트는 말했다. 우리가 억압해 둔 것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라고. 평소에 외면하던 것, 보지 않으려 했던 것, 모른 척했던 것. 그것들이 익숙함의 껍데기를 뚫고 나올 때, 우리는 섬뜩해한다. 익숙함 아래에는 낯섦이 숨어 있다. 우리가 모른 척하는 진실이 숨어 있다. 자메뷔는 그것이 잠깐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자동화한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감정을 무디게 하고, 고민을 줄이려고 행동을 습관화한다. 출근길, 점심 메뉴, 퇴근 후 루틴, 주말 계획.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편하다. 효율적이다. 에너지가 절약된다. 하지만 그 대가가 있다. '익숙함'이라는 마취제에 취해,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수행'하게 된다. 살아 있지만, 살고 있지 않게 된다. 자동항법장치를 켜둔 비행기처럼, 목적지를 향해 날고는 있지만 조종석에 아무도 없는 상태.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어디에도 없는 상태.

도자기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사포질처럼, 일상은 우리를 부드럽게 만든다. 처음의 거칠거칠함이 사라진다. 각이 죽는다. 매끄러워진다. 하지만 동시에 닳게 만든다. 처음의 선명함이 사라진다. 날카로운 감각이 무뎌진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의 설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냄새,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 마루의 감촉. 다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은 안 느낀다. 처음 이 사람을 만났을 때의 떨림. 목소리, 눈빛, 손끝이 스칠 때의 전율. 다 기억난다. 하지만 지금은 안 느낀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의 긴장.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렵고 무서웠다. 지금은 눈 감고도 한다. 다 닳아서 사라졌다. 사포질 당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찾아온 이 낯섦은 거칠고 불편하다. 매끄럽게 굴러가던 일상에 갑자기 돌멩이가 끼어든 것 같다. 삐걱거린다. 불쾌하다.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다. 익숙한 마취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 까슬까슬한 불편함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멈춰 설 수 있다. 달리던 것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고, 질문할 수 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지? 이게 내가 원한 방향이 맞나?

나는 오래된 친구를 보다가 멈춘 적 있다. 술자리였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같이 웃고, 같이 떠들고, 늘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같은 농담, 같은 주제, 같은 리액션. 편했다. 익숙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했다. 저 사람이 누구지? 내가 저 사람의 뭘 알고 있지? 10년이다. 수백 번 만났다. 수천 번 대화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웃는 얼굴, 말하는 습관, 손짓,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 다 아는 것들인데,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익숙함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한 인간이 드러났다.

이상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 친구는 혼자 있을 때 뭘 생각할까. 새벽 3시에 잠 못 들 때 뭐가 떠오를까. 어떤 것이 두렵고, 어떤 것을 후회하고, 어떤 꿈을 아직 포기 못 했을까. 나한테 말 못 한 게 뭐가 있을까. 웃으면서 삼킨 말이 뭐가 있을까. 10년을 알았는데,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술자리에서 하는 얘기는 항상 비슷했다. 일, 연애, 돈, 미래. 표면적인 것들. 그 밑에 있는 것들은 묻지 않았다.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굳이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몇 초 후, 다시 '그 친구'가 됐다. 익숙한 라벨이 다시 붙었다. 하지만 그 몇 초 동안, 나는 처음으로 이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친구'라는 라벨 뒤에 있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우주를 가진 한 인간으로. 그 사람만의 역사가 있고, 그 사람만의 상처가 있고, 그 사람만의 밤이 있다는 것. 나는 그중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는 것. 어쩌면 거의 모른다는 것. 그 사실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사랑이 식는다고 말한다. 연인 사이, 가족 사이, 친구 사이.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무뎌진다고. 처음의 설렘이 사라진다고. 권태가 온다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원래 그렇다고. 하지만 어쩌면,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눈이 닫히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엔 다 보인다. 상대의 모든 것이 새롭고 궁금하다. 눈썹의 모양, 웃을 때 생기는 주름,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만지는 귀, 걸을 때의 리듬, 화날 때 달라지는 목소리 톤. 전부 보인다. 전부 기억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뇌는 자동 처리를 시작한다. "이 사람 알아, 넘어가." 더 이상 새롭게 보지 않는다.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5년 사귄 연인의 얼굴보다, 어제 지하철에서 스쳐간 낯선 사람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기억날 때가 있다. 이상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안 보인다. 소중한 것일수록 흐려진다. 매일 보는 것일수록 안 보인다.

그런데 사람은 변한다. 매일 조금씩. 어제의 그 사람과 오늘의 그 사람은 다르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고, 조금씩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변화를 보지 못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미지로 계속 본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는 틀로 계속 본다. 그래서 어긋난다. 실제로 변한 그 사람과, 내 머릿속의 그 사람이. "넌 변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변한 건 상대가 아니라, 내 눈이 닫힌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함이 낯설어지는 순간은, 그 닫힌 눈이 다시 열리는 순간이다. 강제로. 예고 없이. 불편하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처음처럼. 이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뭘 모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다시 궁금해질 수 있게 된다. 그게 관계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자동 조종을 끄고, 다시 수동으로 조작하는 순간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을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걸 싫어해. 이런 게 장점이고, 이런 게 단점이야. MBTI는 뭐고, 혈액형은 뭐고, 별자리는 뭐고.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하지만 그 정의는 언제 내린 걸까? 10년 전? 20년 전? 어릴 때 부모가 "넌 이런 애야"라고 한 말? 학교에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연인이 말한 인상? 면접에서 대답한 자기소개? 그게 지금의 나와 맞는가? 아직도 유효한가?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흥미로운 현상이 있다. '역사 종결 착각(End of History Illusion)'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에게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얼마나 다른가"라고 물으면, 많이 변했다고 답한다. 가치관도, 취향도, 성격도 달라졌다고. 맞다. 실제로 많이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의 당신은 지금과 얼마나 다를 것 같은가"라고 물으면, 별로 안 변할 거라고 답한다. 지금의 내가 거의 최종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상하다. 과거에는 많이 변했으면서, 미래에는 안 변할 거라고? 착각이다. 10년 후의 당신은 지금의 당신을 낯설게 느낄 것이다. 지금 당신이 10년 전의 당신을 낯설게 느끼듯이. '나'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나'도 변한다. '나'도 모른다.

가끔 나 자신이 낯설다. 왜 나는 이런 선택을 하지? 왜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왜 나는 이렇게 반응하지? 예상과 다른 내가 나타날 때, 당혹스럽다. 이게 나 맞나?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어쩌면, 그 '낯선 나'가 진짜 나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나, 정의된 나, 라벨 붙은 나. 그게 가짜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각본. 더 이상 맞지 않는 옷. 남들이 만든 틀. 스스로 만든 감옥. 자메뷔가 오면, 그 틀이 잠깐 깨진다. 그 틈으로 진짜 내가 보인다.

선불교에서는 비슷한 것을 '초심(初心)'이라고 부른다. 스즈키 순류 선사의 말이 유명하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처음 배울 때는 열려 있다. 모르니까. 궁금하니까. 뭐든 새롭다. 뭐든 가능하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닫힌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더 볼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미 알고 있으니까. 전문가는 많이 안다. 하지만 그만큼 닫혀 있다. 이건 이런 거야, 저건 저런 거야. 가능성이 사라진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다시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안다고 생각한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다. 익숙한 것을 처음처럼 보라는 말이다. 쉽지 않다. 의도적으로 하기 어렵다. 이미 아는 것을 어떻게 모른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익숙함이 낯설어지는 순간은, 강제로 초심이 되는 순간이다. 원치 않았어도. 준비되지 않았어도. 삶이 알아서 우리를 거기로 데려간다. 뇌가 잠깐 착오를 일으켜서, 우리에게 선물을 준다.

그러니 익숙함이 낯설어지는 그 순간은, 마취가 풀리고 진짜 감각이 돌아오는 찰나다. 수술대 위에서 깨어나는 순간처럼. 흐릿하던 것이 선명해지고, 무감각하던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자동항법장치가 꺼지고 수동 조작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갑자기 핸들의 무게가 느껴진다. 페달의 감촉이 느껴진다. 앞을 똑바로 봐야 한다. 집중해야 한다. 긴장된다. 불편하다. 하지만 깨어 있다.

삶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이곳이 정말 네가 원하던 곳인지. 네가 가고 있는 방향이 정말 네가 원하던 방향인지. 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네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얼마나 당연하지 않은지. 다시 한번 선명하게 느끼라고. 잠에서 깨라고. 눈을 떠라고.

카뮈는 이렇게 썼다. "습관이란 삶을 살지 않고 시간만 때우는 방법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길로 출근하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시간에 잔다. 일주일이 하루 같고, 한 달이 일주일 같고, 일 년이 한 달 같다. 어릴 때는 하루가 길었다. 여름방학은 영원 같았다. 지금은 일 년이 순식간이다. 시간이 빨라진 게 아니다. 우리가 멈춘 것이다. 새로운 것이 없으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이 없으니,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지만,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익숙함이 낯설어지는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하루가 다시 길어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느껴진다. 한 잔의 물이 경험이 된다. 창밖의 풍경이 그림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들로 보인다. 세상이 다시 넓어진다.

나는 낯선 거실 한가운데 앉아, 익숙한 컵에 물을 따랐다. 물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졸졸졸. 평소엔 들리지 않던 소리. 컵의 무게가 새삼스러웠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움. 유리의 매끄러움. 물의 온도가 느껴졌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촉이 느껴졌다. 평소엔 그냥 '물 마시기'였던 것이, 하나의 완전한 경험이 됐다. 물을 마신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몇십 년을 마셔왔는데, 오늘 처음 제대로 마신 것 같았다.

그날 밤, 매일 덮던 이불의 감촉을 새롭게 느꼈다. 면의 부드러움, 무게, 온기. 처음 이 이불을 샀을 때가 생각났다. 설레며 처음 덮었던 그 느낌. 창밖의 가로등 불빛을 오래 보았다. 저 불빛이 매일 밤 저기 있었다. 나는 몰랐다. 보지 않았다. 오래 연락 못 한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 별 이유 없이. 그냥 궁금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뭐 하는지, 힘든 건 없는지. 작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났다. 오랜만에.

이 낯섦은 신호다.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 고여 있던 마음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신호.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워야 한다는 신호. 자동 조종을 끄고 직접 운전하라는 신호.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라는 신호.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 감사하라는 신호. 모른다고 생각한 적 없는 것들에 대해 다시 물으라는 신호.

당신의 오늘에도 문득, 낯선 바람이 불어왔다면 두려워하지 말기를. 그건 당신의 일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다. 당신의 뇌가 고장 난 게 아니다. 당신이 미친 게 아니다. 무뎌진 당신을 깨우는 삶의 노크 소리다. 잠자던 당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다. 낯설어진다는 건, 익숙함 뒤에 숨어버린 '진짜'를 발견할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닫혀 있던 눈이 다시 열렸다는 뜻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잠깐 멈춰보라. 주변을 둘러보라. 매일 보는 공간. 매일 쓰는 물건. 매일 지나치는 풍경. 매일 만나는 사람. 처음 보는 것처럼 보라. 처음 만난 것처럼 느껴보라.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른다고 생각하고 보라. 뭔가 보일 것이다. 평소엔 안 보이던 것이. 뭔가 느껴질 것이다. 평소엔 못 느끼던 것이. 뭔가 들릴 것이다. 평소엔 안 들리던 것이. 그게 살아 있다는 거다. 그게 깨어 있다는 거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껴보라. 공기가 들어오고 나간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심장이 뛴다. 너무 익숙해서, 평소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들. 지금 느껴보라. 살아 있다는 게 이런 거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숨을 쉬고 있다. 심장이 뛴다. 지금 여기 있다. 이게 당연한 게 아니다.

익숙함은 편안한 잠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안전하다. 나가고 싶지 않다. 낯섦은 불편한 깨어남이다. 눈이 부시고, 추위가 느껴지고, 긴장된다. 다시 자고 싶어진다. 계속 잘 것인가. 잠깐 깨어볼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것이다. 하지만 알아두라. 잠만 자면, 인생이 끝날 때 후회한다. 깨어 있는 순간들만 진짜 산 것이다. 나머지는 그냥 시간을 때운 것이다.

문이 열려 있다. 낯섦이라는 문이. 불편하지만 진짜인 세계로 가는 문이. 삶이 노크하고 있다. 깨어나라고. 눈을 떠라고. 다시 보라고. 열지 말지는 당신이 정하면 된다. 하지만 가끔은 열어보기를. 그 문 너머에, 당신이 잊고 있던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놓치고 있던 것들이. 당신이 당연하게 여기던 기적들이.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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