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들이 좋아졌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스물 초반까지는 새것이 좋았다. 새 옷, 새 신발, 새 가방, 새 폰. 비닐을 뜯을 때의 쾌감, 처음 전원을 켤 때의 설렘. 모든 것이 반짝였다. 오래된 것은 촌스럽고, 낡은 것은 버려야 할 것이었다. 최신이 최고였다. 그런데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달라졌다. 새것보다 오래된 것에 손이 간다.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30년 된 다방이 좋다. 새로 산 머그컵보다 손때 묻은 컵이 편하다. 최신 음악보다 어릴 때 듣던 노래가 듣고 싶다. 왜 그럴까. 나이가 들면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얼마 전, 오래된 문구점에 들어간 적이 있다. 대형 마트도 아니고, 세련된 디자인 소품샵도 아니고, 동네 골목에 있는 작은 문구점. 유리 진열장에 먼지가 살짝 쌓여 있고, 형광등 불빛이 지직거리고, 주인 할머니가 계산대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벽에는 색이 바랜 달력이 걸려 있었다. 진열대에는 요즘 보기 힘든 것들이 있었다. 종이 편지지, 스티커, 연필깎이, 네임펜. 어릴 때 학교 앞 문구점에서 보던 것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뭔가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살 건 없었다. 필요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가기 싫었다. 그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결국 쓰지도 않을 연필 세 자루를 샀다. 왜 샀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그냥. 그냥 사고 싶었다. 집에 와서 연필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쓰지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그런데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노스탤지어(Nostalgia)'라고 부른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 사라진 시간에 대한 애틋함. 오래전 이 단어는 질병으로 여겨졌다. 17세기 스위스 의사 요하네스 호퍼가 처음 이 용어를 만들었는데, 고향을 떠난 용병들이 앓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Nostos(귀향)'와 'Algos(고통)'의 합성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고통. 치료가 필요한 정신 질환이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은 다르게 본다. 노스탤지어는 병이 아니라 자원이다. 사우샘프턴 대학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 교수 연구팀은 20년 넘게 노스탤지어를 연구해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놀라웠다. 노스탤지어를 느끼면 외로움이 줄어들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삶의 의미를 더 강하게 느끼고, 미래에 대한 낙관성이 증가한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된다니. 이상하게 들리지만, 연구 결과는 일관되게 이것을 보여준다.
왜 그럴까. 연구자들은 '자기 연속성(Self-continuity)'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심리적으로 안정된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의 나는 공중에 붕 떠 있는 존재가 된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불안해진다. 노스탤지어는 그 뿌리를 확인시켜준다. 오래된 물건을 만지고, 오래된 노래를 듣고, 오래된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과거의 나와 연결된다. "저때도 나였고, 지금도 나야." 그 연속성이 안정감을 준다. 삶이 쪼개진 파편들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느낌. 그게 위로가 된다.
신경과학도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노스탤지어를 느낄 때 뇌에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보상 회로가 활성화된다. 도파민이 분비된다.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노스탤지어를 느낄 때,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된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멍하니 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할 때 작동한다. 자아 성찰의 뇌 영역이다. 노스탤지어는 단순히 기분 좋은 추억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심층적인 심리 작용이다.
오래된 것들에는 '아우라'가 있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철학자가 쓴 개념이다. 아우라는 복제할 수 없는 고유한 분위기,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말한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 그림을 생각해보라. 고화질 사진으로 볼 수 있다. 포스터로 인쇄해서 벽에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진품 앞에 서는 것과는 다르다. 똑같이 생겼는데 다르다. 왜? 진품에는 시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500년 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손이 닿았던 그 캔버스. 수백 년을 견뎌온 그 물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온 그 역사. 그것이 아우라다. 복제품에는 없는 것. 새것에는 없는 것. 오래된 것만이 가진 고유한 무게.
내 책상 위에는 아버지의 만년필이 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쓰시던 것이다. 지금은 잘 안 쓰인다. 잉크가 잘 안 나올 때도 있다. 새 만년필을 사면 훨씬 부드럽게 써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만년필을 버리지 못한다. 이 금속 몸체에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다. 아버지가 이 펜으로 무엇을 썼을까. 연애편지를 썼을까, 사직서를 썼을까, 나의 이름을 처음 썼을까. 모른다. 하지만 상상한다. 이 작은 물건이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나를 연결해준다. 기능적으로는 쓸모없을지 모르지만, 이 만년필은 대체 불가능하다. 새것으로 바꿀 수 없다. 그게 오래된 것의 힘이다.
우리는 점점 오래된 것을 잃어가는 시대에 산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뀐다. 스마트폰은 1년마다 새 모델이 나온다. 유행은 한 철을 못 간다. 건물은 몇십 년이면 허물고 새로 짓는다. 동네는 재개발되고, 골목은 사라지고, 오래된 가게는 문을 닫는다. 효율의 논리, 최신의 논리가 지배한다. 새것이 항상 더 좋다. 오래된 것은 뒤처진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는 정말 새것만으로 살 수 있을까.
심리학자들이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물 중 가장 소중한 것을 꼽아보라고 했다. 대부분 오래된 것을 골랐다. 새로 산 비싼 물건이 아니라,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반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인형, 오래된 사진첩. 금전적 가치로 따지면 얼마 안 되는 것들이다. 새것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소중하다고 했다. 왜? 그 물건에 시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건의 가치는 가격표로 측정되지 않는다. 시간과 의미로 측정된다.
일본에는 '와비사비(侘寂)'라는 개념이 있다. 불완전함, 무상함, 미완성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미학이다. 금이 간 찻잔, 색이 바랜 천, 낡아서 닳은 나무. 서양의 기준으로 보면 버려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와비사비의 눈으로 보면,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 왜? 시간이 지나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삶이 묻어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새것인 물건에는 삶이 없다. 아직 살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낡고 닳은 물건에는 삶이 있다. 살아진 시간이 있다.
킨쓰기(金継ぎ)라는 기법도 있다.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일본의 전통 수리 기법이다. 보통은 깨진 그릇을 버린다. 아니면 보이지 않게 붙여서 원래대로 복원하려 한다. 하지만 킨쓰기는 다르다. 금간 자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금으로 강조한다. 깨졌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왜? 깨지고 다시 이어진 것이 더 아름답다고 보기 때문이다. 깨진 적 없는 완벽한 그릇보다, 깨지고 회복된 그릇이 더 가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가 된다. 이것이 오래된 것을 대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오래된 관계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친구.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 그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 편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들이 있다. "그때 그거 기억나?" 하면 바로 통하는 것들이 있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는 내 역사를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는 내 역사의 일부를 함께 살았다.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해준다. 그 사람 안에 과거의 내가 살아 있다. 그래서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를 다시 만난다. 그게 위로가 된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나이가 들수록 오래된 관계의 가치를 알게 된다. 20대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신났다. 가능성이 무한해 보였다. 30대가 되니 달라진다. 오래된 친구가 그립다. 나를 아는 사람이 그립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그립다. 새로운 관계는 가능성이지만, 오래된 관계는 뿌리다. 둘 다 필요하지만, 뿌리 없이는 꽃이 피지 않는다.
오래된 노래가 주는 위로도 있다. 라디오에서 10년 전 유행하던 노래가 나온다. 순간 시간 여행을 한다. 그때로 돌아간다. 그때 내가 어디 있었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 무엇을 고민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다 떠오른다. 음악은 기억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뇌과학에서는 이를 '음악-유발 자서전적 기억(Music-Evoked Autobiographical Memory)'이라고 부른다. 음악은 해마와 편도체를 자극해서,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치매 환자도 옛날 노래를 들으면 잠깐 깨어난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음악은 기억한다. 그만큼 음악과 기억의 연결은 깊다.
오래된 장소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다시 가본 적 있는가. 골목의 폭, 담장의 높이, 나무의 위치. 몸이 기억한다. 머리로 잊은 것을 몸이 기억한다. 여기서 뛰어놀았다. 여기서 넘어졌다. 여기서 친구를 기다렸다. 장소에는 기억이 스며 있다. 오래된 장소는 타임캡슐이다. 가기만 하면 과거가 풀려나온다.
하지만 오래된 장소들이 사라지고 있다. 어릴 때 살던 동네는 재개발됐다. 아파트가 들어섰다. 골목이 사라졌다. 이제 그 기억을 확인할 장소가 없다. 머릿속에만 남았다. 언젠가 그것도 희미해지겠지. 오래된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기억의 닻이 사라지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닫히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뿌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 '뉴트로(New-tro)'가 유행하는 건지도 모른다. 레트로의 새로운 버전. 옛날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LP판이 다시 팔린다. 필름 카메라가 다시 유행한다. 다방 스타일 카페가 생긴다. 할머니 감성, 할아버지 감성이 힙해졌다. 왜? 새것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빠른 변화에 피로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뿌리가 필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효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새것만으로는 만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오래된 것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하이데거는 '도구(Zeug)'에 대해 썼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도구들. 망치, 의자, 펜. 이것들은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 못한다. 그냥 쓴다. 그런데 도구가 고장 나거나 사라지면, 그제야 보인다. 아, 이게 있었구나. 이게 필요했구나. 오래된 물건도 비슷하다. 평소에는 그냥 거기 있다.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라지면 허전하다. 빈자리가 느껴진다.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걸 그제야 안다.
나는 요즘 오래된 것들을 의식적으로 지키려 한다. 새것으로 바꾸고 싶은 유혹이 들 때, 한 번 더 생각한다. 이 물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담겨 있는가. 이것을 버리면 무엇을 잃는가. 물론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다. 낡아서 못 쓰게 되는 것도 있다. 시대에 뒤떨어져서 불편한 것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다. 가치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위로가 있다. 그것은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위로다. 너 이전에도 사람들이 살았고, 너 이후에도 사람들이 살 거라는 위로다. 오래된 찻잔을 들 때, 이 잔으로 차를 마셨던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진다. 오래된 책을 펼칠 때, 이 페이지를 넘겼던 수많은 손가락이 느껴진다. 나 혼자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다. 긴 역사의 일부다. 긴 흐름의 한 점이다. 그 연결감이 위로가 된다.
또 하나의 위로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이 있다"는 위로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젊음도 지나가고, 사랑도 지나가고, 아픔도 지나간다. 하지만 오래된 것들은 증명한다. 시간을 견뎌낸 것이 있다고. 100년 된 나무, 500년 된 건물, 1000년 된 유물. 그것들이 아직 여기 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쓸어가지는 않는다. 남는 것이 있다. 견디는 것이 있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 나도 뭔가를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라져도 내 흔적은 남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가 쓰던 물건을 만지며 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들의 위로. 그것은 화려하지 않다. 시끄럽지 않다. 새것처럼 반짝이지 않는다. 하지만 깊다. 조용히 스며든다. 곁에 있으면 든든하다. 새것이 자극이라면, 오래된 것은 안식이다. 새것이 가능성이라면, 오래된 것은 뿌리다. 새것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오래된 것은 뒤를 돌아보게 한다.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새것에만 열광한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잊어간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것들을 지키고 싶다. 오래된 물건, 오래된 장소, 오래된 관계, 오래된 기억. 그것들을 소중히 하고 싶다. 나의 뿌리를 지키고 싶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오래된 것이 되고 싶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떠올리며 위로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오늘 저녁, 오래된 무언가를 꺼내보려 한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물건, 오래 안 들은 노래, 오래 안 본 사진, 오래 연락 못 한 친구. 그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면, 그 안에서 과거의 내가 손을 흔들 것이다. 잊고 있었지? 나 여기 있었어. 우리 함께였잖아. 그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게 위로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위로다.
새것은 설렘을 준다. 오래된 것은 위로를 준다. 설렘도 필요하고 위로도 필요하다. 하지만 지치고 힘들 때, 방향을 잃었을 때, 내가 누군지 모르겠을 때, 나는 오래된 것들에게로 간다. 거기서 나를 찾는다. 거기서 쉰다. 거기서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오래된 것들이 나를 붙잡아준다. 시간 속에서 표류하지 않게. 뿌리 뽑혀 날아가지 않게.
당신에게도 오래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꺼내보시라. 만져보시라. 그것들이 말을 걸 것이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와 함께였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속삭여줄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시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지나간 것들이 당신 안에 살아 있다고. 그게 위로다. 오래된 것들만이 줄 수 있는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