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왜 아름다울까. 가만히 서 있는 나무도 아름답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다르게 아름답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움직인다는 것, 흔들린다는 것, 그 자체가 생명이라는 느낌. 흔들리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돌은 흔들리지 않는다. 콘크리트는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는 흔들린다. 풀은 흔들린다. 물은 흔들린다. 살아 있는 것들은 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요즘 특히 많이 흔들린다. 이게 맞는 길인가. 이 선택이 옳았나.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서른을 앞두고, 아니 서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흔들린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줄 알았다. 확신에 차서 살 줄 알았다.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그런데 아니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흔들린다.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게 되니까. 확실한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한때는 그게 부끄러웠다. 이 나이에 아직도 모르겠다니. 이 나이에 아직도 흔들린다니.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다. 흔들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흔들리는 게 오히려 건강한 거 아닐까.
대나무를 생각해 본다. 대나무는 강하다. 하지만 그 강함은 단단함에서 오지 않는다. 유연함에서 온다. 태풍이 불어도 대나무는 부러지지 않는다. 휘어진다. 땅에 닿을 만큼 휘어진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일어선다. 만약 대나무가 참나무처럼 뻣뻣했다면 부러졌을 것이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유연한 것은 살아남는다. 노자가 말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딱딱하고 뻣뻣해진다. 초목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흔들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유연하다는 것이다.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도 그렇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약해 보인다. 형태가 없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물은 바위를 뚫는다. 시간이 걸릴 뿐, 결국 뚫는다. 물은 어떤 그릇에도 담긴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된다. 저항하지 않는다. 그냥 따른다. 하지만 그렇게 따르면서도 자기 본질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물이다. 형태는 바뀌어도 본질은 그대로다. 노자는 물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래서 도에 가깝다고 했다. 흔들리는 것, 유연한 것,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 그게 강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고 부른다. 역경을 겪은 후 다시 일어서는 능력. 중요한 건,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똑같이 흔들린다. 어쩌면 더 많이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 휘어졌다가 다시 펴진다.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강한 게 아니다. 흔들린 후에 다시 일어서는 것이 강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 슬플 때 슬퍼하고, 화날 때 화내고, 불안할 때 불안해한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러고 나서 털어낸다. 반면 회복탄력성이 낮은 사람들은 감정을 억누른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단단해 보이려고 애쓴다. 하지만 억누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쌓인다. 그러다 한꺼번에 터진다. 부러진다.
우리 사회는 흔들리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흔들리면 약한 것이다. 흔들리면 부족한 것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져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워라." "뚝심 있게 밀고 나가라."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웠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척한다. 불안하면서도 괜찮은 척한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한다. 그 연기가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 남들한테도 피곤하고, 나한테도 피곤하다. 흔들리지 않는 척하느라 진짜 나를 숨긴다. 진짜 감정을 숨긴다. 진짜 생각을 숨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흔들림을 다르게 봤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했다. 불안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유의 증거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불안하지 않다. 본능대로 살면 되니까. 하지만 인간은 선택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그 자유가 불안을 낳는다. 그러니까 불안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니까. 자유롭다는 증거니까.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라고 했다. 자유는 무겁다.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 내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내가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흔들린다. 이게 맞나? 저게 나은가? 후회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르트르는 말한다. 그 흔들림을 피하지 말라고. 확실한 것에 기대지 말라고. 종교든, 이념이든, 사회의 기대든, 그런 것들 뒤에 숨어서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흔들리면서 선택하라고. 그게 진정한 자유이고, 그게 진정한 삶이라고.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을 특별하게 봤다. 그에게 불안은 세속적인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평소에 우리는 바쁘게 산다.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가야 할 곳.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러다 가끔 불안이 찾아온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불안하다.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 순간이 기회라고.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던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게 정말 내 삶인가. 흔들림이 깨어남의 계기가 된다.
촛불을 생각해 본다. 촛불은 흔들린다. 가만히 있어도 흔들린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린다.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린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형광등은 흔들리지 않는다. 일정하게 밝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형광등 불빛을 '아름답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촛불은 비효율적이다. 밝기도 일정하지 않다. 언제 꺼질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촛불 앞에서 마음이 편해진다. 왜일까. 흔들림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하지 않음이 따뜻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는 '와비사비(侘寂)'라는 미학이 있다. 불완전함, 불균형, 무상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깨진 찻잔, 색이 바랜 천, 비뚤어진 도자기. 서양의 눈으로 보면 결함이다. 버려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와비사비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다. 완벽한 것에는 생명이 없다. 기계가 만든 것처럼 차갑다. 하지만 불완전한 것에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시간의 흔적이 느껴진다. 살아온 이야기가 느껴진다. 흔들리고, 깨지고, 바래고, 닳은 것들. 그것들이 오히려 아름답다.
킨츠기(金継ぎ)도 있다.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기법이다. 보통은 깨진 것을 버리거나, 보이지 않게 붙인다. 깨진 흔적을 숨긴다. 하지만 킨츠기는 다르다. 깨진 자리를 금으로 메운다. 오히려 더 잘 보이게 한다. 깨진 적 없는 완벽한 그릇보다, 깨지고 다시 이어진 그릇이 더 아름답다고 본다. 상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역사가 된다. 흔들리고 깨진 적이 있다는 것, 그것이 가치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사람,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사람,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부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이가 있을까. 따뜻함이 있을까.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흔들려본 사람이 좋다. 깨져본 사람이 좋다. 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에게는 깊이가 있다. 겸손함이 있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있다. 자기 약함을 알기 때문에, 남의 약함에도 너그럽다. 자기 상처를 알기 때문에, 남의 상처도 보인다.
레너드 코언이라는 가수가 있다. 그의 노래 'Anthem'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모든 것에 금이 가 있다, 그래서 빛이 들어온다. 완벽한 것에는 빛이 들어갈 틈이 없다. 금이 가야 빛이 들어온다. 상처가 있어야 빛이 들어온다. 흔들려야 빛이 들어온다. 그러니까 금이 간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흔들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거기로 빛이 들어온다. 거기서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심리학에서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개념이 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오히려 성장하는 현상이다. 물론 트라우마는 고통스럽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미 겪었다면, 그것이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심각한 질병, 사고, 상실 등을 경험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전보다 더 깊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 강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보고한다. 흔들림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다. 깨지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고통을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미 흔들렸다면, 이미 깨졌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태어나려면 깨져야 한다. 성장하려면 흔들려야 한다. 기존의 나를 깨뜨려야 새로운 내가 나온다. 편안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대로다. 흔들림이 있어야 변화가 있다. 불편함이 있어야 성장이 있다.
바다를 본다. 바다는 한순간도 고요하지 않다. 파도가 친다. 물결이 인다. 철썩인다. 그 흔들림이 바다다. 만약 바다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바다가 아니라 호수다. 아니, 호수도 바람이 불면 흔들린다.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 물은 고인 물이다. 썩어가는 물이다. 흔들려야 살아 있다. 흔들려야 신선하다. 흔들려야 바다다.
그리고 윤슬. 물결 위에서 햇빛이 부서지며 반짝이는 것.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잔잔한 물에서는 윤슬이 생기지 않는다. 거울처럼 고요한 수면에서는 빛이 그냥 반사될 뿐이다. 밋밋하다. 하지만 물결이 일면 다르다. 수천 개의 작은 물결이, 수만 개의 작은 면이, 각각 다른 각도로 빛을 받아 흩뿌린다. 부딪히고, 흔들리고, 부서지면서 빛이 태어난다. 마찰이 있어야 윤슬이 생긴다. 흔들림이 있어야 반짝임이 생긴다. 고요한 물도 아름답지만, 윤슬이 이는 물은 살아 있다. 숨을 쉰다. 춤을 춘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 마찰 없이 사는 삶에서는 윤슬이 생기지 않는다. 부딪혀야 한다. 흔들려야 한다. 때로는 부서져야 한다. 그래야 빛이 난다. 그래야 반짝인다. 너무 평탄한 삶은 고요한 호수 같다. 잔잔하고 평화롭지만, 어딘가 밋밋하다. 빛이 그냥 지나가버린다. 하지만 파도치는 삶은, 흔들리는 삶은, 윤슬이 인다.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불안한 순간들이, 부딪히는 순간들이, 햇빛을 만나 반짝임이 된다. 나중에 돌아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 흔들렸기 때문에, 그때 부딪혔기 때문에, 빛이 부서지며 윤슬이 생긴 것이다.
사람의 심장도 흔들린다. 두근두근. 리듬이 일정하지 않다. 심장 박동이 완전히 규칙적이면 오히려 문제다. 건강한 심장은 약간의 불규칙성이 있다. 이것을 '심박변이도(Heart Rate Variability)'라고 한다. 심박변이도가 높을수록, 즉 심장 박동의 흔들림이 클수록, 건강하다고 본다. 스트레스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심박변이도가 낮으면, 즉 심장 박동이 너무 규칙적이면, 건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건강한 게 아니다. 적절히 흔들리는 것이 건강한 것이다.
요즘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직업이 사라지고, 기술이 바뀌고,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확실한 시대가 있었던 적이 있나. 과거의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았다. 전쟁, 질병, 기근, 혁명. 인류 역사는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흔들리면서도 버텼다. 적응했다. 성장했다. 흔들림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확실성은 환상이다. 우리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저렇게 하면 행복해진다. 하지만 그런 공식은 없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다. 같은 선택을 해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하다. 변수가 너무 많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불안한 게 당연하다. 그걸 인정하면 오히려 편해진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대신, 흔들리면서도 괜찮다고 인정하면 편해진다.
나는 오래된 시 한 편을 좋아한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꽃은 흔들리면서 핀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뿌리를 내린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세운다. 흔들림 없이 핀 꽃은 없다. 사랑도 그렇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없다.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다투고, 상처받고, 그러면서도 이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흔들림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나도 여전히 흔들린다. 이게 맞나 싶을 때가 많다. 후회할 때도 많다. 불안할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흔들림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흔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 한다. 그게 솔직한 것이니까. 그게 인간적인 것이니까. 완벽하게 확신에 찬 사람이 오히려 무섭다. 그 사람은 뭔가를 보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흔들린다. 진짜 느끼는 사람은 흔들린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은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것은 완벽하지 않음의 아름다움이다.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이다. 가능성의 아름다움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아직 변할 수 있다는 것, 아직 성장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흔들림이 말해주는 것이다. 딱 굳어버린 것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흔들리는 것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장이 남아 있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다 위로 윤슬이 인다. 나도 흔들린다. 괜찮다. 흔들려도 괜찮다. 흔들리면서 뿌리를 내리면 된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세우면 된다. 흔들리면서 꽃을 피우면 된다. 흔들리면서 빛을 받으면 된다. 그러면 윤슬이 생긴다. 반짝임이 생긴다. 흔들림을 부정하지 말자. 흔들림을 숨기지 말자. 흔들림을 환영하자. 거기에 삶이 있다. 거기에 성장이 있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당신도 지금 흔들리고 있는가. 괜찮다.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게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다. 흔들리는 당신이 아름답다. 완벽하지 않은 당신이 아름답다. 불안해하는 당신이, 고민하는 당신이, 방황하는 당신이 아름답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 아름답듯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아름답듯이. 파도치는 바다가 아름답듯이. 윤슬이 이는 물결이 아름답듯이. 흔들리는 당신이 아름답다. 부딪히고 흔들리는 당신의 삶 위로,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이 부서지며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