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

by 슈펭 Super Peng


나는 혼자 컸다고 생각했다.
힘든 건 혼자 버텼고, 결정은 혼자 내렸고, 지금의 나는 내가 만든 거라고. 그게 자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근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 — 그게 아니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다만 그 손들을 잊고 있었을 뿐.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인간의 성장을 '근접발달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으로 설명한다. 혼자서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누군가의 손이 있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 우리가 혼자 컸다고 느끼는 건 착각이다. 정확히는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산다.


누군가 나를 위해 조용히 해준 것들

말하지 않고 해준 것들이 있다.

따로 고맙다는 말을 요구하지도 않고, 티도 내지 않고. 그냥 어느 날 보니 되어 있는 것들. 내가 힘들 때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어 준 사람. 내 몫까지 슬쩍 해치워놓은 사람. 내가 실수했을 때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려준 사람.

그 사람들은 아마 기억한다. 내가 기억 못 할 뿐.

뇌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기억은 '감정의 강도'에 따라 저장된다. 편도체는 감정적으로 강렬한 순간을 우선 저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싸운 날, 크게 울었던 날은 기억하지만 — 조용히 옆에 있어준 날은 잊는다. 그 사람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삶의 진짜 버팀목은 대부분 그 조용한 순간들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는데 기억조차 못 하는 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한테는 그냥 지나간 한마디였는데, 그 사람은 집에 가서 곱씹었을 수도 있다. 잠 못 잤을 수도 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공감 격차(Empathy Gap)'라고 부른다. 내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을 때, 다른 감정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험을 제대로 상상하지 못하는 것. 내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이, 이미 무너져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크게 꽂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면서, 내가 준 상처는 쉽게 잊는다. 그 비대칭이 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소리 없이.



연락이 끊긴 사람들

한때 매일 봤던 사람이 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울고, 서로의 이름을 제일 많이 불렀던 사람. 근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뜸해졌고, 그다음엔 없어졌고, 지금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 '궁금하지 않게 된 시점'이 언제였는지 나는 모른다.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인간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수는 평균 150명 정도라고 했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 그 안에서도 진짜 핵심은 5명 안팎이다. 우리의 뇌는 모든 관계를 동시에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그게 슬프다. 잊었다는 사실보다, 언제 잊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관계는 끝날 때 끝나는 게 아니라, 궁금하지 않게 될 때 끝나는 것 같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했다. "관계는 선언이 아니라 행위다."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쌓여 끝이 된다. 우리는 그 조용한 끝을 너무 쉽게 흘려보낸다.




손의 기억

어릴 때 나는 손으로 살았다.

찰흙을 주무르고, 색종이를 접고, 레고를 쌓았다. 못 만들어도 괜찮았다. 완성도 같은 개념이 없었다. 그냥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목적이었던 시절.

지금 나는 하루에 손가락으로 수천 번 타이핑을 한다. 스크롤을 내린다. 화면을 두드린다. 근데 '만든다'는 느낌이 없다. 무언가를 만지고, 뭉개고, 다시 빚는 그 감촉이 없다.

신경과학적으로 손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뇌에서 손을 담당하는 영역은 신체 비율에 비해 압도적으로 넓다. 신경학자 프랭크 윌슨은 저서 《손》에서 이렇게 말한다. 손의 움직임이 곧 사고의 발달이라고. 손으로 만지고 만드는 행위가 인간의 인지 능력, 창의성, 감정 조절과 직결된다고. 디지털로 옮겨가면서 우리가 잃은 건 단순한 감촉이 아니다. 손이 기억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공예를 놓지 않는다


몸이 먼저였던 시절

어릴 때는 몸이 먼저였다.

그림을 잘 그리려고 그린 게 아니었다. 그냥 그렸다. 노래를 잘하려고 흥얼거린 게 아니었다. 그냥 나왔다. 머리가 검열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게 좋은가, 나쁜가, 잘하는 건가, 못하는 건가' 그런 질문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몸보다 빨라졌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평가 불안(Evaluation Anxiety)'이라고 부른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우리는 행위 자체보다 행위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하게 된다. 철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의 상태 시간이 사라지고, 자의식이 사라지고,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그 상태를 어린 시절엔 자연스럽게 경험했는데, 어른이 되면서 점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뛰다가 넘어지고, 다쳐도 또 뛰던 몸이 있었다. 그 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실패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다시 일어났다. 그게 언제부터 무거워졌는지. 언제부터 넘어질까 봐 뛰지 않게 됐는지.

몸이 먼저였던 시절을 우리는 잊고 산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이 문장을 내뱉을 때, 왜 이렇게 쓸쓸한 걸까.

변한 건지, 잊은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나는 원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원래 노래를 잘 불렀는 데는 아니고, 그냥 잘 불렀는데. 원래 혼자 산책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게 언제부터 사라졌지.

사라진 게 아닐 수도 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위계로 설명했지만, 그가 말년에 가장 강조한 건 '자아실현'보다 '존재의 기쁨'이었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취향을 능력으로 바꿔버렸다. 좋아하는 것도 잘해야 의미가 있다고 믿게 됐다. 못하면 부끄러운 거라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다가 멈췄고,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조용해졌고, 춤을 추다가 굳어버렸다.

좋아하는 걸 잃은 게 아니다. 좋아해도 된다는 걸 잊은 것이다. 못해도 해도 된다는 걸 잊은 것이다. 그 허락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는 걸 언제부터인가 잊어버렸다.


"이것만 되면 행복할 텐데"라고 했던 것들

목록을 한번 써본 적 있다.

취업만 되면. 이사만 하면. 이 관계만 정리되면. 살만 빠지면.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졌다. 근데 나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기뻐했는데 금방 잊었다. 다음 '이것만 되면'으로 넘어갔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빠르게 적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행복 수준이 1년 후에는 당첨 전과 비슷해진다는 연구가 있다. 우리의 뇌는 변화에만 반응하고, 익숙해진 것은 배경으로 밀어 넣는다. 생존을 위한 설계다. 그러나 이 설계의 부작용은 이미 가진 것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릴 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들을 지금 갖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까먹고 산다. 그때의 내가 지금 나를 보면 "너 지금 엄청 잘 살고 있잖아"라고 할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또 다른 결핍을 찾고 있다.

포기한 줄 알았던 꿈도 있다. 근데 가만 보면 포기한 게 아니라 그냥 잊어버린 것들이 많다. 포기는 아프다. 잊는 건 아프지도 않다. 그래서 더 무섭다. 언제 놓았는지도 모르게 손에서 빠져나간 것들.





아프지 않은 날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파본 사람은 안다.

임상심리학에서 '부재의 감사(Gratitude for Absence)'라는 개념이 있다. 없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통증이 없는 것, 숨이 편한 것, 소화가 잘 되는 것. 이것들은 있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뇌의 항상성 유지 시스템이 '정상 상태'를 아예 인식 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만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안 아프면 또 잊는다. 잘 잔 다음 날 아침의 그 개운함, 배가 적당히 부른 순간의 충만함, 햇볕이 등에 닿을 때의 온기. 이것들이 사실 꽤 좋은 순간인데, 우리는 그냥 지나친다.

아이처럼 뛰어다니던 몸이 있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또 뛰었다. 그 몸이 언제부터 무거워졌는지, 언제부터 계단이 귀찮아졌는지 모른다. 서서히 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변화를 목격하지 못한다. 신경과학에서는 이것을 '감각 순응(Sensory Adaptation)'이라고 한다. 자극이 지속되면 신경 반응이 줄어든다. 몸이 변해도 우리는 그 변화를 실시간으로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몸은 기억하는데, 우리가 몸을 잊는다.



평범한 하루

지금 이 순간이 나중에 그리워질 거라는 걸 안다.

알면서도 흘려보낸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시간적 할인(Temporal Discounting)'이라고 부른다. 미래의 가치보다 현재의 즉각적 자극을 더 크게 느끼는 것. 먼 미래의 '그리움'보다 지금 당장의 '지루함'이 더 실감 나기 때문에, 우리는 알면서도 흘려보낸다.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오늘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 하루가, 누군가에겐 평생 원하던 하루일 수 있다. 건강한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고, 오늘 먹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는 이 하루. 세계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 이 하루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근데 지루하다.

그걸 탓하고 싶지 않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가진 것에 익숙해지고,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도록.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행복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현재를 잃지 않으면 된다." 쉽게 들리지만, 그게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매일 증명하고 있다.

다만 가끔은 알아채도 좋겠다. 오늘 이 평범함이 사실은 꽤 단단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혼자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수많은 사람의 말과 손과 침묵을 먹고 자랐다.

우리는 이미 원하던 것들을 갖고 있는데, 새로운 결핍을 찾아다닌다.

우리는 손으로 만지고 느끼던 감각을 잃어가면서, 그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우리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고, 관계가 식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좋아하는 걸 좋아해도 된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주는 걸 잊는다.

잊는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간은 없고, 잊어야 오늘을 살 수 있기도 하니까. 정신분석학에서는 망각을 '심리적 생존 기제'로 보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면 인간은 버티지 못한다.

그러나 너무 많이 잊으면, 어느 순간 지금 여기 서 있는 이유도 잊게 된다.

그러니까 가끔은, 잠깐만 멈춰도 좋겠다.

받은 것들을, 지나간 사람들을, 못해도 좋아했던 것들을, 아프지 않은 오늘을, 이미 이룬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번쯤 알아채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그냥 오래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다.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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