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1': 당신이 읽고 버린 우리의시간

by 슈펭 Super Peng

나는 숫자 '1'이 사라지는 순간을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보고 말았다. 보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다 화면을 열었을 때 이미 그것은 없어져 있었다. 상대방의 손가락이 내 글자를 스쳐 지나갔다는 뜻이다. 두 번 고쳐 쓴 문장을,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잠깐 멈췄던 그 망설임을, 그 사람은 이미 지나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혹시 입력 중 표시가 뜰까 싶어서. 뜨지 않았다. 다른 것을 하려 했다. 됐다. 안 됐다. 그 대화창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나만 계속 그 안에 머물렀다. 상대방의 마음은 이미 딴 데 가 있는데, 나만 여전히 거기서 대답을 기다렸다.

그 비대칭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숫자 '1'은 참 이상한 기호다.

수학적으로는 가장 작은 양의 정수. 그러나 카카오톡 말풍선 옆에 붙은 '1'은 세상에서 가장 작지 않은 숫자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붙어 있는 동안, 나는 적어도 아직 가능성의 세계 안에 있다. 상대방이 아직 읽지 않았으니, 읽은 뒤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 '1'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읽씹'이라는, 어쩐지 그 냉기가 단어에서부터 느껴지는 신조어.

심리학자 나오미 아이젠버거(Naomi Eisenberger)는 사회적 거절이 뇌에서 처리되는 방식을 연구했다. 피험자들이 온라인 게임 도중 다른 참가자들에게 배제당했을 때, 활성화된 뇌 영역은 신체적 통증을 처리하는 부위와 같았다. 사회적 배제는 은유적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통증이다.

나는 이 연구 결과를 처음 접했을 때, 이상하게 위로받았다.

내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나의 신경계가 진화적으로 설계된 방식대로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수십만 년간 집단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집단으로부터의 배제를 죽음의 위협과 같은 무게로 처리하도록 만들어졌다. '1'이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서늘함은, 그러므로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인간임의 증거다.

그러나 위로가 고통을 지우지는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모두가 바쁜 건 안다. 연락을 잘 못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연락을 못 보는 사람인지, 아니면 '연락을 잘 안 본다'는 말을 방패로 삼는 사람인지를.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익이 생기면 먼저 연락을 해오기 때문이다.

부탁이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같이 가면 좋을 자리가 생겼을 때. 그때는 읽씹이 없다. 답장이 빠르다. 심지어 먼저 말을 건다. 평소에는 며칠씩 무음으로 살던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신속하게 화면을 켠다.

이것은 바쁨이 아니다. 선택이다.

나의 연락은 선택받지 못했고, 그 사람의 필요는 선택받은 것이다. 그 차이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성격 차이'나 '연락 스타일의 문제'로 희석시켜왔다. 그러나 이름을 정확하게 붙여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이기심이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것이 있다.

'나 원래 연락 잘 안 봐.' 이 말을 방패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우리는 화장실에서도 휴대폰을 본다. 밥을 먹으면서도,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화면을 들여다본다.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하루 네 시간을 훌쩍 넘는 시대다. 알림이 오면 반사적으로 손이 간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몸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런 시대에 '연락을 잘 안 보는 성격'이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면서, 카카오톡 알림은 안 본다는 것이 성립하는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꼬박꼬박 확인하면서, 내 메시지는 못 봤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연락을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내 연락을 안 보는 것이다. 그 차이를 '성격'이라는 말 뒤에 숨기지 말았으면 한다.



모든 것을 다 보면서, 선택적으로 못 본 척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태도다. 그리고 태도에는 책임이 따른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한 번쯤 봤을 것이다.

대화창에서 말이 뚝 끊기는 순간을. 분명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상대방의 말이 어느 순간부터 오지 않는다. 기다린다. 아직 오지 않는다. 더 기다린다. 그러다 그 대화는 그냥 끝난다. 마침표도 없이. 마무리도 없이.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말하다 마는 것이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정확히 그 짓을 한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 '지금 바빠'라는 한 마디가 그렇게 힘든가. 손가락 다섯 글자. 치는 데 3초가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3초가 없다고 한다. 연락은 안 보면서 유튜브 알고리즘은 넘긴다. 릴스는 스크롤하면서 답장 창은 열지 않는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심심해지면 돌아온다.

자기가 무료해질 때. 대화 상대가 필요해질 때. 그때는 쪼르르 답을 돌고 다니며 상대해줄 사람을 찾는다. 아까는 바빴던 그 손가락이, 지금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나는 그 사람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대기열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다. 선택받은 게 아니라, 순번이 온 것이다.

자신의 시간은 소중하다. 맞다. 그런데 그 논리라면 남의 시간도 소중하다. 내가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시간도, 누군가의 하루 중 일부다. 그 시간을 함부로 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바빠도 한 마디, 나중에 연락할게 한 마디—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최소한의 예의다.

연인 사이에서 연락 문제로 싸우는 커플이 많은 이유가 있다. 연락의 빈도를 두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싸움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나는 당신에게 우선순위인가. 당신의 하루 안에 나는 어디쯤 있는가. 그 질문에 답을 못 받아서 싸우는 것이다. 연락은 수단이고, 싸움의 진짜 이유는 존재감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가 점점 도구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관계를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삼고, 목적이 사라지면 관계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는 방식. 이것이 이제는 냉혹한 예외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일상적인 방식이 되어버렸다.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 유형이 아니다. 그러나 디지털 연결망은 이 패턴을 전례 없이 쉽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정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쓰거나. 그 물리적 비용이 자연스러운 필터 역할을 했다. 진짜로 마음이 없으면 그 비용을 치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필요할 때 카카오톡 창을 열면 된다. 필요가 사라지면 읽고 닫으면 된다. 관계를 유지하는 척하는 비용이 0에 가까워졌고, 그 결과 관계를 진짜로 유지하려는 의지도 0에 가까워졌다.

연락처 목록은 500명인데, 진짜로 나를 챙기는 사람은 몇 명인가. 우리는 이미 그 숫자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너무 작다는 것도.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많이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상 가장 정밀하게 단절을 경험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과거의 단절은 모호했다. 편지가 오지 않아도, 상대방이 바쁜 것인지 아픈 것인지 나를 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호함은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 상상의 여지가 있었다. 그 사람은 어쩌면 편지를 잃어버렸을지도. 길이 막혔을지도.


그러나 지금의 단절은 정밀하다. '읽음' 표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후 2시 37분에 읽었다는 것, 그럼에도 3시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 현대의 단절은 상대방의 의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모호함이 사라진 자리에, 해석의 여지도 함께 사라졌다.

더 서늘한 것은, 이것이 이제 비정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차가움에 적응했다. '원래 다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먼저 연락하는 것이 약해 보일까 봐 참는다. 읽씹당해도 두 번 보내는 것이 민망해서 기다린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예민한 것처럼 느껴질까 봐 혼자 삼킨다.

그 사이 유대(紐帶)라는 것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유대는 필요와 필요가 맞닿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무 필요 없이도 안부를 묻고, 별다른 이유 없이도 보고 싶어 하고, 이익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안녕을 신경 쓰는 것 그것이 유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관계를 ROI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쏟는 에너지만큼 돌아오는가. 이 관계는 나에게 이득인가.

효율, 생산성, 최적화. 일에만 적용되던 언어가 사람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관계도 관리하는 것이 되었고, 사람도 네트워크 자원이 되었다. 그 언어가 우리의 감각 안으로 들어와, 우리는 어느새 사람을 유용한 사람과 유용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읽고 버려진 메시지들. 필요할 때만 켜지는 따뜻함.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차가움.

나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차가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차가워지는 법을 배운 것이다. 먼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버려지지 않기 위해. 먼저 필요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방어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두꺼운 유리 뒤에서만 대화하게 되었다. 서로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온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 화면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돌이켜보면, 나는 답장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여전히 그 사람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답장은 수단이었고, 목적은 존재 확인이었다. 당신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 있는가. 나는 여전히 거기 있는가.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나-그것(I-It)'의 관계와 '나-너(I-Thou)'의 관계. 상대방을 기능적 대상으로 대하는 방식과, 온전한 주체로 만나는 방식. 부버에 따르면 우리는 '나-너'의 순간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이 주체로 인정될 때, 비로소 존재가 완성된다.

읽고 버려진 메시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어쩌면 '나-너'의 관계를 갈망하는 존재가 '나-그것'으로 취급되었을 때의 충격이다. 나는 당신에게 '너'로서 다가갔는데, 당신은 나를 '그것'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다.

그 서늘한 화면 앞에서, 나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된다.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응답 여부에 내 존재의 무게를 걸었는가. 타인의 '읽음'이 나의 존재를 확인해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어디서 왔는가.

심리학에는 '외부 조절(external regul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반응으로부터 계속 확인받으려는 패턴. 이것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충분히 안전하게 연결된 경험이 부족했을 때 발달하는 생존 전략이다. 나는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혼자서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타인의 응답이라는 거울 앞에 계속 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진 '1'이 고통스러운 것은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닐 수 있다. 내가 그 숫자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걸었기 때문일 수 있다. 나의 시간, 나의 가치, 나의 존재감 너무 많은 것을 그 작은 숫자 하나가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숫자 '1'은 확인의 표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당신 마음의 마침표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숫자 '1'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그 이상으로 읽어버린 것이 나였다면, 내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상대방의 응답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그 작은 기호 하나에 그토록 목말랐는가다.

나는 오늘도 그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배우고 있다. 그 화면을 덮는 법을. 기다리지 않는 법이 아니라 기다리면서도 그 기다림에 나를 전부 내주지 않는 법을.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은 아름답다. 그러나 연결이 확인되지 않을 때도, 나는 이미 존재한다. 답장이 오지 않는 그 시간 동안에도, 나는 살아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조용한 저항이다.



인사는 왜 하는가.

그 질문에 거창한 답이 필요하지 않다. 인사는 '나는 당신을 알아본다'는 가장 짧은 선언이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나는 보았다는 것. 그 한 마디가 없으면 상대방은 투명인간이 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 인사는 그러므로 예의의 시작이 아니라, 예의 그 자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인사를 잃어가고 있다.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끝이 없다. 말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다. 분명 연결되어 있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이 침묵을 우리는 종종 '바쁨'이라고 부르거나, '성격'이라고 부르거나,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확한 이름은 따로 있다.


무례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하면 된다. 지금 여유가 없으면 없다고 말하면 된다.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된다. 그 한 마디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관계의 온도 차이가 있다. 말 한 마디가 아까워서 침묵을 선택한 사람은, 사실 상대방의 시간과 감정을 아깝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때로 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침묵이 의도된 언어일 때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을 때, 그 침묵은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그냥 귀찮아서, 그냥 별로여서, 그냥 나중에 하려다 잊어버린 침묵은 메시지가 아니다. 방치다.

사람을 방치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태도다.

그리고 그 태도는, 인사 한 마디로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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