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평등'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환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고,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한다는 강박. 재벌이든, 전문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르바이트생이든, 심지어 백수든,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단일한 지상명령 아래 놓인다. 이는 타고난 재능과 환경, 그리고 그에 따라 형성된 각기 다른 성향과 성격이라는 고유한 지문들을 애써 지워버리려는 무모한 시도다. 주류 언론과 미디어, 사회는 획일적인 성공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주입하며,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폭력적인 메시지를 세뇌한다. 심지어는 남자와 여자를 동일한 생물체로 치부하며, 본질적인 차이마저 부정하려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전체주의적인 성향에 의해, '사회성'이라는 명목 아래 그 허상에 맞춰 살아보려 안간힘을 쓴다. 그 결과, 사회는 때로는 공무원이나 의사와 같은 특정 직업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도록 개인을 내몰고, 이제는 어린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의대 진학을 종용하는 기현상마저 벌어진다. 심지어 정부까지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의대 증원을 주장하는 것은, 전국민적인 맹목적 광기가 들끓는 반지성적 국가의 모습까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과정의 끝에 진정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대다수의 한국인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 전쟁 폐허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선을 넘나들며 건국과 산업화를 이룩했던 세대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모든 고난을 악마화하고 도덕적 허영에 취해 '평등'이라는 허상의 가치를 추구한 민주화 세대가 지금의 혼란한 시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적 혼돈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그 안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야 하는가? 오랜 사색 끝에, 나는 그 해답이 다름 아닌 '자기 수용'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본인이 얼마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아끼고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음에 찾아오는 평화는 그 어떤 외부적인 성공보다 값지다. 나에게는 그것이 먼저였다. 스스로를 온전히 끌어안는 연습이 된 다음에야, 비로소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아무런 목적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람마다 그 순서는 다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복잡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유목민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허상 아래 스스로를 지쳐가게 만드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의 고유한 색깔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정한 평등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스스로를 수용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불행의 고리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