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시간

계절의 그림자를 따라

by 슈펭 Super Peng


세상의 모든 시작은 멈춤에서 온다. 도시의 아침은 늘 분주한 숨결로 깨어나고, 낡은 시계추처럼 익숙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궤도 위에서, 나는 무심하게 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 시간의 감각이 깨어났다. 마치 얼어붙었던 호수에 잔물결이 이는 듯, 너의 그림자가 닿는 곳마다 잊었던 색채들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복도 끝, 늘 같은 시간에 열리던 그 길목에서 마주치던 너의 뒷모습은 이제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교실 문턱을 넘어서던 찰나, 살짝 비스듬히 기울어진 어깨선 위로 내려앉던 창밖의 햇살 한 조각. 혹은 쉬는 시간, 낡은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던 너의 옆모습은 마치 정지된 한 폭의 그림처럼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쨍한 복도 불빛 아래, 오직 너의 발걸음 소리만이 유독 선명하게 귓가를 스쳤고, 그 소리가 아득히 멀어질 때마다 아쉬움이 손끝에 남아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내 안의 모든 감각은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생명처럼 서툴고 조심스러웠다. 네가 있는 곳이라면 괜스레 한 번 더 발걸음을 옮기고, 슬쩍 던진 시선이 너에게 닿을까 봐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고개를 숙이곤 했다. 입술을 앙다물고 애써 모른 척했지만, 볼은 햇살에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올랐고, 심장은 네 발자국 소리에 맞춰 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리듬으로 두근거렸다. 점심시간, 식판을 들고 네가 앉은 테이블을 몰래 훔쳐보던 그 짧은 찰나에도, 세상은 온통 너의 조용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는 듯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할지라도, 나에게는 매일매일 펼쳐지는 작은 기적이었다. 운동장 벤치에 앉아 무심코 주고받았던 농담 속에도, 도서관 책장 사이로 스며든 옅은 숨결 속에도, 우리는 알 수 없는 특별한 언어로 소통하고 있었다. 낡은 교실의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처럼, 너는 아주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내 세계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노트의 여백에 그려진 잉크 번짐처럼, 너의 존재는 내 삶의 결을 바꾸어 놓았다.
아직은 여린 새싹 같은 감정들. 거창한 약속이나 뜨거운 고백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설렘이었다. 화려한 수식어가 없어도, 그저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너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박한 바람만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너라는 계절 속에서, 나는 가장 순수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모든 것이 시작될 것만 같은, 그런 풋풋하고 따뜻하며, 영원히 잊히지 않을 떨림으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언제쯤 행복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