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필터를 통과한 사람들

내 삶의 가장 진한 여운

by 슈펭 Super Peng


삶은 흡사 한 편의 긴 다큐멘터리 영화와 같습니다. 수많은 장면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죠. 어린 시절에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조명과 발랄한 웃음소리, 그리고 많은 군중들에 쉽게 매료되곤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고, 인맥의 넓이가 곧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필름이 길어지고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즉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가장 깊고 진한 여운을 남기며, 내 삶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결국 시간의 필터를 뚫고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있는 몇몇의 인물들이라는 것을요.





세월은 가장 정직하고 때로는 냉혹한 필터입니다. 삶의 풍파라는 거친 바람이 불어올 때, 어떤 인연은 솜털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리고, 어떤 인연은 모래성처럼 흔들리다 결국 뿌리째 뽑혀나가기도 합니다. 마치 잔치가 끝나고 모든 조명이 꺼진 뒤의 적막함처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어둠이 찾아올 때, 비로소 진정한 관계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그때, 굳이 애써 화려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아도,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저 묵묵히 나의 그림자처럼 존재해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 때 옆에 조용히 앉아주거나, 지친 어깨에 따뜻한 손을 얹어주거나,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는 방식으로 침묵의 지지를 보내주었을 겁니다. 그들의 눈빛이나 어깨 토닥임 하나에서 우리는 '아, 내가 이 고통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생명줄 같은 안도감과 위안을 얻곤 합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힘이 되는,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남아주는 사람들이 매번 연락하거나, 우리의 모든 것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뿐이지만, 마음속 깊이 늘 나를 염려하고 있다는 굳건한 확신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학창 시절 친구 한 명이 그렇습니다. 서로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경조사를 챙기는 정도지만, 가끔 뜬금없는 시간에 오는 그의 문자는 제 일상 속 작은 울림이 됩니다. 제가 힘들 때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제가 보내는 한두 마디에 이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괜찮니? 힘들면 말해'라는 짧지만 진심 어린 메시지를 보내오는 친구. 물리적인 거리가 아무리 멀어져도, 혹은 각자의 삶이 너무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해도, 그들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 '나의 편'으로,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직감합니다. 그들은 관계의 양적인 측면, 즉 보이는 빈도나 횟수보다 마음의 깊이와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굳이 애써 나를 포장하거나, 완벽한 모습을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안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하고 견고한 공간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여정에서 쌓이는 관계의 총량은 늘어나지만, 정작 내 삶의 핵심을 이루는 '알맹이 같은 인연'은 점차 압축되어 갑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몇몇 얼굴들처럼,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무게를 공유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삶의 전부가 됩니다. 그들은 당신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함께했고, 가장 치졸하고 나약한 모습을 목격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준 사람들입니다. 함께 웃고 즐거웠던 순간의 기억도 물론 소중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유대감은 역경을 함께 견디고, 서로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깊은 신뢰와 존중에서 피어납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마치 오래 묵은 와인처럼 깊은 풍미를 더해가고, 잘 빚어진 도자기처럼 견고하며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들은 단순한 지인이 아니라, 나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관계의 외형적 크기나 일시적인 즐거움보다 그 내면에 담긴 밀도와 진정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과정일 것입니다. 삶의 격랑 속에서 끝까지 나의 손을 놓지 않아 준 사람,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어 준 사람, 멀리 있어도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준 사람. 그들은 단순히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을 넘어, 우리 삶의 가장 빛나는 이정표이자 흔들리지 않는 닻이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존재는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오고, 그들에 대한 감사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한 여운으로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존재들 덕분에 비로소 '혼자가 아니다'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으며, 삶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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