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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않기

by 이효명 Jan 15. 2025

기대는 무언가를 바라게 하고, 그 일이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을 때 더 큰 상처가 된다. 사람에게, 상황에게, 나 자신에게 기대했던 일들이 무너질 때마다 마음도 함께 무너진다.

새해 첫날부터 수술을 앞둔 시어머니 때문에 남편이 걱정했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라 김천에 계신 어머님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와도 모시고 갈 수 없는 상황이다. 시동생 내외가 이번엔 어머님을 돕기로 했다. 시동생이  기차표도 끊고 동서는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도 다녀왔다. 그런데 남편은 동생과 의사소통 과정에서 기분 상한 일이 있었나 보다. 어머님이 시동생 집에 와 계신 동안  "어머님께 전화드려볼까?"라고 물어보니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만 한다.

주말이다. 딸은 친구들과 함께 만화카페에 갔다. 오래간만에 남편과 둘이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아이 좋아하는 메뉴에 관계없이 남편에게 맛있는 밥 한 끼 사주고 싶었다. 부부로 10년 이상을 함께 살아왔다. 이젠 서로의 표정만 봐도 이 사람이 어떤 말을 해 줄 것인지 알게 된다. 이번 시동생과의 일은 그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함께 초밥을 먹으러 갔다. 애피타이저로 작은 접시에 가락국수가, 그리고 연어 양배추 샐러드가 먼저 나왔다. 점심 특선 초밥을 주문했기에 여러 가지 종류의 초밥이 일본식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접시 위에 알록달록 차려졌다. 조용히 말없이 고추냉이와 간장을 곁들인 장에 초밥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어머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볼까 생각하던 중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산병원에 다녀왔는데 검사를 더 해봐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후남편이 병원비에 대해 말을 꺼냈다.

시부모님은 노후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흔한 실비보험도 없다. 보험 자체가 없다. 아버님께서 젊은 시절 " 보험은 다 사기야."라며 고집을 피웠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당장 수술비가 걱정인 상황이다. 돈 이야기는  좋은 말로 더 이상 마무리 지을 수 없이 민감하다.  남편을 달래주려는 의도로 기분 좋게 시작한 식사였지만 결국 식사의 끝은 남편의 잔소리로 마무리 지었다.
"이제까지 모아놓은 돈 없냐. 저축 좀 하고 살자. 새해에는 정신 차리자."

식사를 마치고 쏜 김에 풀 코스라며 커피까지 사주겠다 했다. 운영하고 있는  학원 1층 건물에 있는 커피숍에서 1500원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했다. 나도 커피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남편의 잔소리에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난 돈도 아낄 겸 학원 가서 믹스커피 마실게."라고 남편 커피만 주문한 채 서둘러 같은 건물 4층에 위치한 학원으로 출근했다.  

조금 기대했다. 남편이 내 커피를 사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원까지 올 줄 알았다. 학원 문을 열고 불을 켜고 난방을 틀고 자리에 앉았다. 한 10분여 믹스커피를 준비하지 않고 문 입구를 바라보며 양손에 커피를 든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다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  예전 같았으면 카톡 메시지로 한바탕 퍼부었을 것이다. '어쩜 내 맘을 몰라주냐. 내 커피를 사서 올 줄 알았다. 매정한 인간...' 등의 험악한 말로 말이다. 그때마다 늘 싸움이 되었다.
"필요하면 말을 하라고. 말을 해야 안다고."
눈치 없는 신랑의 레퍼토리다. 또 내가 기대했구나, 기대한 내가 잘못이거니 생각하며 믹스커피를 종이컵에 부었다.

어느 순간부터 남편에게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섭섭한 마음을 글로 풀어낸다. 신기한 건 글을 쓰고 나면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화가 나지 않는다. 미운 감정이 그대로 흘러 지나간다. 조금 남아 있던 앙금도 마무리가 되는듯하다. 내  마음은 정리가 되지만 글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쪼잔하긴 하다.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커피 사건은 남편에게 화내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기대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실망이 줄어드는 건 분명하다. 괜스레 나 혼자 한 기대에 실망만 커질 때가 많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남편을 바꾸려고만 했다. 센스 없는 신랑에게 센스의 "ㅅ"자 하나라도 생기기를 바랐다.  글을 쓰면서 알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바꾸려 하기보다 내가 어떤 시선으로 관계를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살면서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도 그리고 나에 대한 기대도 말이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기대를 줄이니 실망도 줄어들었고, 대신 내가 가진 현재의 순간들이 더 소중해졌다. 오늘 남편과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그 순간이 행복했다.

오늘 커피값 1500원을 아꼈다.  남편의 말대로 올해는 커피값을 조금 줄이고 저축을 해야겠다. 올 연말에 두둑이 가득 찬 통장의 잔액을 슬쩍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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