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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를 느낀날

by 이효명 Jan 18. 2025

"좀 파면 좋겠다."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딸의 귓속에 자리 잡고 있는 큰 귀지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병원에 왔을 때도 눈에 띄었지만, 손을 뻗어 직접 파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서 면봉으로 빼내려 해도 완강히 거부하는 딸 앞에서 나는 번번이 실패했다.
의사선생님이 잠시 딸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좀 파볼까?"
그리곤 불빛이 달린 헤드셋을 쓰고 딸의 귀를 살폈다.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는 딸을 잡으며 선생님은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하나도 안아파. 걱정 마."

그날은 딸이 독감 진단을 받고 처방받은 약을 다 먹은 뒤 다시 병원을 찾은 날이었다. 평일 아침이라 서둘렀더니 대기 2번으로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진료실 안, 선생님 앞 의자에 앉은 딸은 숨소리를 점검받고 귀와 입 안도 차례로 살폈다. 진찰 도중, 그 귀지가 다시 눈에 띄었다. 무심코 속으로 하던 말을 조용히 입 밖으로 흘려버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선생님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절로 미소가 나왔다. 센스 없고, 똑바로 쳐다보고 말해야 알아듣는 남편과 산 지 10년이 넘다 보니, 내 작은 혼잣말에 귀 기울여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주는 선생님의 모습이 더 인상 깊었다.

종종 이런 경험이 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챈다고 느껴질 때다. 예를 들면, "어젯밤을 새워서 제정신이 아니야."라고 했더니 친구가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내밀 때, 추운 날 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고 말하려던 찰나, "먼저 뜨끈한 거 하나 먹을까?"라며 메뉴를 정해줄 때, 저녁 반찬을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오늘은 외식하자."라고 할 때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 따뜻한 불빛이 켜지는 기분이 든다.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세심히 살피고 있는지 느껴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배려다. 나의 눈빛, 표정, 말투 속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괜찮아?"라고 묻는 짧은 질문 하나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깊이를 보여준다. 배려는 거창한 행동이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혹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섬세함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 이런 배려를 받으면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더 단단해진다.

호흡기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온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귀가 조금 아프다는 딸의 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엄마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됐네."
"엄마 목소리는 똑같이 들리는데?"
이상하게도 내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올해는 나도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배려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작은 관심과 배려가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한 등불을 켜는 불씨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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