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사람은 선 자리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본다’ 일견 맞는 말이다. 마치 눈을 감고 코끼리의 코를 만지는 이와 다리를 만지는 이가 각자 다른 동물을 감각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 입장은 현상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위 명제를 정치에 적용하는 것을 꺼린다. 이 명제를 정치에 적용하게 되면 마치 진영 논리가 객관적 실체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치는 과학의 영역과 달리 진리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가 각각 세상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병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태도다. 흔히 양비론자 혹은 중도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실 정치적인 문제에 무감각하거나 언제나 착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이들이다. 어쩌면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선은 이런 비겁한 이들을 위한 경계일지 모른다.
여기서 진보와 보수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보와 보수는 경제, 권력구조, 기타 사회 영역 등에서 각기 다른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구분될 수 있다. 가령 다른 누구보다 노동운동에 앞장선 이가 집에서는 가부장적일 수. 있는데 이 경우 이 사람은 진보적이며 보수적인 인간일 수 있다.
정치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이뤄지는 실천이다. 정당은 정치적 실천을 위해 모인 사람의 집단이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정당은 같은 이념으로 묶인 이들의 집단이므로 이념은 중요한 문제다’ 나는 과감히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이념은 시대에 따라 충분히 갈아 끼울 수 있다. 가장 편한 이념적 구분인 진보와 보수는 언제든지 그 위치가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노예제 폐지를 이끈 정당은 공화당이다(당시 민주당은 노예제 폐지에 반대했다.) 지금은 보수 진영이라 평가받는 정당이다. 시대가 변하고 미국 민주당은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섰다. 나중에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정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수다. 이는 정치의 본질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 ‘전쟁은 정치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말을 뒤집어 ’정치는 전쟁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다. 정당에 있어 이념은 전쟁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통치인 점을 감안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쪽이 승리하는 전쟁이 바로 정치로서 민주주의다.
정치는 분명 전쟁이라는 점에서 승패가 존재한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후보로 나온 정당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주권자 개인의 합이고 참여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승패는 결정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체에 적용된다.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채 전쟁의 주체가 정치인이라 여기며 비판만 일삼는 것은 반찬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와 같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본인이 직접 요리하면 된다.
가장 기본적인 정치 참여 방법은 정당에 가입하는 것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다. 정당에 가입하면 선거에 나올 후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흔히 뽑을 사람이 없다는 이들은 먼저 정당에 가입해 자신이 원하는 선택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면 된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무슨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바로 전쟁의 목적이다. 사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와 목숨을 구걸하는 군인과 국가로부터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과감히 희생할 줄 아는 군인, 둘 중 어떤 군인이 더 훌륭할까. 이건 정치인들을 위한 비유가 아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유권자에 적용되는 비유다. 자신의 경제적 욕망을 위해 투표하는 것과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투표하는 것 무엇이 전쟁의 목적에 더 적합한지 생각해 보라.
진보와 보수는 부차적인 문제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정치를 대하느냐가 더 본질적인 문제다. 우리는 정치인에 대한 손쉬운 비난으로 책임을 방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스스로 사적 이익에서 벗어나 공적 관심을 고민하고 있는가. 그게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