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전 편 >
'상담심리전공'과 '사회복지전공'이 결합한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와 같은 학부는 총 12개가 존재했다. 이러한 학부끼리 협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의체가 '학부협력회'이다. 학부 간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각각의 대표와 부대표들은 주 1회 기본 회의 및 긴급회의에 소집됐다. 그래서 본인의 학부 사업뿐만 아니라 학부협력회 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제야 왜 사람들이 이 요직을 피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정말 바빴다.
대표로 선출된 후 학부협력회 MT에 갔다. 나처럼 새로 선출된 대표와 부대표는 물론, 이미 임기 중인 사람들도 모두 참석해야 했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엘리트처럼 여겨져 의기소침했다. 나도 한 학부의 대표였는데도 말이다. 어색함을 버텨내며(괜찮은 척하며) 일정을 소화했다. MT 후반부에 학부협력회에서의 직책을 선정하는 시간이 왔다. 끊임없는 역할 부여에 대해 큰 부담을 느껴서 괜히 대표가 되었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소문에 의하면 모두가 '사업추진위원회'를 꺼렸다. 왜냐하면, 이번 학기에 '학부합창대회' 행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 행사는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합창 경연을 하는 만큼 규모가 컸다. 만약 사업추진위원회에 소속된다면 이번 학기의 고생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신입의 눈치로 인해 고난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학부협력회 소속 사업추진위원회의 부디렉터가 됐다(디렉터는 언론정보학부의 대표가 맡았다).
약 3개월 동안 많은 회의를 거치며 행사를 준비했다. 어색했던 초반이 지나자 서로 친해지면서 업무 협력이 수월해졌다. 특히 과거에 사랑의 마라톤을 기획했던 경험이 큰 도움 됐다. 나는 대규모의 학생들이 오고 가는 동선을 짜는데 신경을 쏟았고, 특유의 꼼꼼함으로 여러 가지 돌발 상황들을 대비했다. 행사 당일,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행사가 무사히 종료됐다. 동료와 허탈함과 기쁨을 나누며 새벽에 해장국집에서 뒤풀이했다. 또다시 해냈다는 성공 경험이 내 안에 쌓이는 순간이었다.
학부협력회에서의 첫 학기 끝 무렵, 마지막 회의 때 발생한 일이다.
"이제 다음 학기 학부협력회 의장 선출이 있겠습니다"
그 순간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학부협력회 의장은 모든 학부 대표의 대표로서, 모든 안건을 다뤄야 하는 총책임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학부협력회 의장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의장이라는 자리가 지닌 상징성에 괜스레 설렜다. 그러나 운 좋게 이 자리까진 올 수 있었지만, 아직 리더들의 리더인 의장까지 맡을 내공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쉬웠지만 수긍했다. 그때 지난 학기 사업추진위원회 소속이었던 한 사람이 나를 후보로 추천했다. 내가 후보로 등록되자마자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호응이 터져 나왔다. 이 분위기에선 승산이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진짜로 의장이 되는 건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또 다른 학부 대표가 자신을 후보로 추천했고, 나와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는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후보였다. 이러다 내가 괜히 망신만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투표가 시작됐고, 꽤 큰 격차로 내가 당선됐다. 이 와중에도 떨어진 후보의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왜 당선됐을까 의아했다. 평소에 의견을 많이 개진하지도 않고, 카리스마 있게 사람들을 통솔한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학부협력회 의장이 됨으로써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과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이미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고통 대다수는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생각들로부터 발생한다. "나는 못생겼어", "뚱뚱해서 보기 싫어", "말을 더듬잖아", "키가 작아서" 등,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가 동일하게 상대방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러한 단점들을 이유로 상대방이 나를 거절할 것이란 불안을 느낀다.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다. 학부협력회 의장 선출 사건은 그동안의 '부정적인 자아상'에 의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었다.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은 정확하지 않구나'라며 불신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들어 갈 리더 상이 내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점점 더 큰 기대감으로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내 3대 학생 대표로서 '총학생회장', '학생생활관 자치회 의장', '학부협력회 의장'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 학부협력회 의장은 모든 학부를 대표하여 본 회의 예산 집행, 회의 소집, 사업 전반의 집행을 관장한다. 하지만 학부 업무만 하는 건 아니다. 총학생회, 자치회의 예산 집행을 견제하고, 정치적인 공방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학생 정치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익을 얻기 위해 타 집단을 공격하는 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아서 굉장히 괴로웠다. 상대방과 비판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친절함이 리더의 덕목이라고 믿어 온 나에게 비난은 큰 벽이었다. 모든 단체가 치열하게 토론을 펼치는 총학생회 자리에선 발언 기회를 잡기 전까지 손을 덜덜 떨 정도로 긴장했다. 상대방이 내 주장에 대해 바로 반박하진 않을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혹시 말을 더듬어서 무시당하진 않을까 모든 것이 두려웠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온 문제인 만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발언 내용이 실시간 속기록으로 작성되고 있고, 학생 신문사가 참관하는 상황이어서 부담감이 더 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아직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상황을 회피했다. 하지만 학부협력회 의장으로 나간 자리에선 도망갈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터질듯한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게 입술을 꽉 깨물어 버텼고, 수십 번 속으로 되뇐 후 발언 신청을 했다. 말을 할 때마다 청중의 반응을 살폈는데 예측과 달리 상대방 측은 덤덤하게 넘어갔다. 오히려 내 발언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우려가 정말 현실을 반영하는지 천천히 확인해 갔다. 이는 암흑 속에서 손으로 바닥을 더듬더듬 짚어가며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모습과 같았다. 느렸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갔다.
어느 날 큰 사건이 터졌다. 학교 측으로부터 교내 버스 요금 인상안이 일방적으로 공지되었고, 학생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특히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학생과 교직원의 갈등으로 비화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청회와 회의가 소집됐다. 특히 교직원과 학생 대표들 간의 협상 자리에 총학생회장, 자치회 의장과 더불어 나도 참석했다. 그때 정말 감개무량했다. 과거의 은둔형 외톨이가 학생 대표 중 한 명으로서 중요한 교섭 맡은 장면이 매우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가슴에 뜨거운 감정으로 가득 메워졌다. 비로소 내 도전이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 영역에서는 고전했지만, 학부협력회 공동체에선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 다양하고 복잡한 안건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검증했고, 학부 간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역량도 기를 수 있었다. 학부협력회 사람들은 나를 리더로서 믿어줬고, 이들과의 관계는 현재까지도 좋다. 그들과 나눈 추억들은 학부협력회 의장이란 도전이 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