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존 문제에서 찾는 사랑의 정의와 사랑의 기술
사탕처럼 달콤하다는데
하늘을 나는 것 같다는데
(...)
하루 종일 웃고 있다는데
세상이 다 아름답다는데
위의 노래 가사는 트와이스의 "What is love?"란 노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전역한지 이제야 1년이 훌쩍지난 필자에게는 옛날 고전 명곡들 보단 아직 아이돌 노래가 더 친숙하게 느껴져서인지 몰라도,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 사랑! 그것은 인류가 무리를 짓기 시작해서 콘크리트 건물의 숲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까지 전 역사에 걸쳐서 우리들을 괴롭혀 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생물학적인 성적 끌림이 포장된 아름다울 뿐인 말일까? 아니면 영혼과 영혼이 서로 끌리는 숭고한 정신활동일까? 어쩌면 서로의 사회적인 거래 관계 속에서 싹트는 흔한 감정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하나의 대상에 수많은 인연과 이슈들이 거쳐갔기에 세상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시, 소설, 수필, 영화, 그림, 조각상, 노래 등등 많은 창작물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런 여러가지 해답들 속에서 우리는 모순적으로 정답을 더욱 더 갈망하는 것 같다. 사랑이란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대해야 잘 하는 것일까? 후회없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최근 사랑에 눈 뜨기 시작한 후 필자에게도 오랜 인류의 숙제가 주어졌다. 감도 오지 않는 이 어려운 숙제에 조금이라도 단서를 주었던 책은 바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1. 사랑, 인간 실존의 문제
프롬은 사랑에 대한 어떠한 이론이든 인간의 실존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며,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을 시작으로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전개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동물계로부터, 곧 본능적인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났고 자연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한 번 결별한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인간은 오직 철저하게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인 인간적 조화를 찾아내면서 오직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을 뿐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자기 자신, 동포,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을 인지하면서 위와 같은 상황으로 떠밀려 분리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근원적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프롬은 이런 분리가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며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은 성서의 아담과 이브의 일화로 잘 표현 되어 있다.
곧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과 서로를 알게 된 다음,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그들이 서로 다른 성에 속하는 것처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남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아담이 이브를 뱀의 꼬임에 넘어가버린 이브를 감싸기보다는 오히려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하고 한 사실에서 매우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뒤따르는 수치심, 불안,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이 인간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고 근원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문화와 시대에 상관 없이 동일한 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대답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의 기록이 현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프롬은 분리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합일의 시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1) 도취적 융합에서 이루어지는 합일
--> 온갖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 마약, 술, 섹스, 축제, 원시부족의 의식(적 축제)
2) 집단과의 일치에 의해 달성되는 합일
--> 관습, 관례, 신앙, 체제 속 집단과의 일치
3) 생산적 작업(창조활동)에서 이루어지는 합일
--> '나 자신'이 계획하고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는 일에만 해당.
그러나 위와 같은 합일들은 진정한 인간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생산적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대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도취적 융합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일시적이다. 일치에 의해 달성된 합일은 사이비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힙일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프롬은 완전한 해답은 대(對)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하는 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인간적 합일에는 여러가지 형태와 방식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뭉뚱그린 것이 사랑인 것일까? 아니면 여태 인본주의적 종교 및 철학체계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덕의 기준에 맞춘 고상한 합일만을 사랑이라고 특별취급 해야 하는 것일까?
프롬은 이러한 어의상의 난점들 때문에 자의적인 해답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共棲的 ;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 함께 있는 것) 합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미숙한 형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그 중에서 프롬은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즉, 프롬이 제시하는 사랑은 분리상태에 놓여져 있고 그 상태를 인지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겪은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중한 방식을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2. 현대사회 속 사랑의 현주소
그렇다면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랑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또 그에 대해 저자인 프롬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여러분은 이런 말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똥차 가고 벤츠 올거야..."
"올해는 좋은 사람 만나서 제대로 연애해봐야지."
"그 사람은 나랑 급이 안 맞아. 나 정도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너도 이번에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지!"
위 대사들은 흔히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딱히 이런 말들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형태의 생각들이나 말투들을 우리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람들 술자리, 식사자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필자도 친구들을 위로 할 때 위와 같은 대사를 쓴 적이 있으며, 은연 중에 이성에 대해 위와 같은 잣대를 들이댄 적도 많다. 아마 「사랑의 기술」 책을 읽기 전까지 본인이 사랑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혹시 공통점이 보이는가? 눈치 챈 사람도 있지만,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 초점이 사랑의 대상에만 집중되어 있다. 좀 더 들어가보자. 단지 대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의 사랑의 능력적인 면, 곧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몰두한다. 즉,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 본인이 가진 사랑의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 또는 (외모/경제적) 능력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의 여러 가치들을 일명 '연애시장'이라는 시장원리에 빗대어 생각함으로써 일종의 '급'을 메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급과 동등하다거나 그 이상이 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 프롬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능력은
그 문화가 평범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달려 있다.
즉, 현대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이 어떠한 것인가에 따른 특징들이 현대인들의 사랑의 능력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럼 현대사회가 가지는 특징은 무엇인가?
몇몇 소수의 국가들을 제외하고 현대사회 구조는 두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정치적 자유의 원리와 시장의 원리이다. 특히 시장의 원리로 인해 모든 사물과 인력, 기술들이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통용된다. 여기에 인격적 가치는 예외가 아니게 된다.
그럼 현대사회가 바라는 현대인의 모습에는 무엇이 있을까? 프롬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특징으로 정리하였다.
1. 원할하게 집단적으로 잘 협력하는 사람들
2.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3. 취미가 표준화 되고, 쉽게 영향 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
4. 권위나 원리, 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5. 위와 같이 느끼면서도 기꺼이 명령에 따르고, 사회가 기대하는 일을 하고 마찰 없이 사회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6. 폭력 없이 괸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되고 목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현대사회는 별 다른 갈등 없이도 집단과 사회적 기구에게 순응하고 협력적으로 행동하지만, 개개인들은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착각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을 원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속적이고 더 많은 소비를 통해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원한다.
저자는 위와 같은 요소들을 통해서 현대인들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현대인은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장 조건 아래에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서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어진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인 결과로 생기는 깊은 불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더 나아가서 현대 문화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저자는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노동의 규격화)
2. 오락의 규격화
특히 오락의 규격화는 오락산업에 의해 수동적으로 유도되어 소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은 절망을 극복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것"에 있다. 이것은 곧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고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최종적으로 이러한 사화적 성격과 현대인의 사랑의 성격은 대응된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인격이라는 상품을 교환할 수 있고 공정한 거래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와 같이 소외된 구조를 가진 사랑, 특히 결혼의 가장 중요한 표현의 하나가 '팀'이라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에서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내기 위해서 부부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는 것이다.
상호 성적 만족인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인 사랑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표준적' 형태다.
흔히 세간에서 "자잘한 것 가지고 싸우지 말고 서로 존중하면서 넘어가라, 그런 갈등을 잘 피해가는 것이 좋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파트너, 팀원으로서 존중하면서 원만한 '팀플레이'를 강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귀찮아질까봐 피곤해질까봐 마찰을 피하고, 파고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상대방을 '존중'한다고 착각하는 것. 이것은 관계에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기적인 태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근원적 무관심, 이기주의로 점철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진정한 사랑의 태도
저자도 위와 같은 특징들로 이루어진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는 기술을 전 생애에 들여서 전심을 다해 연마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세한 기술해설법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서 기대하고 책장을 넘겼다가는 큰 실망을 하게 될까봐 걱정된다고까지 서술 해놓을 정도로 기술 그 자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시피하다.
다만, 「사랑의 기술」에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사랑의 실천 부분에서 필요한 요소를 네 가지 요소를 주장한다.
1) 훈련
우선 기술의 실용에 있어서 훈련은 필수요소이다. 단지 하고 싶다는 기분만으로 접근을 하면 취미는 될 수 있으나, 특정 수준 이상으로는 결코 그 기술에는 숙달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기술은 어떤 특수 기술의 실용을 위한 훈련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 생애를 통한 훈련이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2) 정신집중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데에 필요한 정신적 요소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다.
3) 인내
위 두 가지 요소를 이행하는데에 있어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인내이다.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의 숙달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4)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
그 기술이 최고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비기너는 이 기술을 필요 이상으로 숙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애호가 정도로 남을 뿐 결코 명장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사랑의 기술에도 필요하다.
프롬은 여기서 하나를 덧붙여 제시한다. 바로 자기 자신이 기술 훈련의 도구가 되어야 할 만큼의 삶 전체를 사랑에 바치거나 적어도 관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즉 말해서 사랑의 기술에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 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프롬은 위 요소들 이외에도 사랑에 임하는데 중요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이어나간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반면 외부 세계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오직 이러한 현상이 자아도취적 인간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라 경험된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개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한다고 주장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자아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 본인의 상과 흥미, 욕구, 공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와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기술을 익히는데 필요한 요소들과 태도들 능력들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프롬은 '신앙'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면서 사랑에 있어서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프롬이 말하는 신앙은 단순히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자 근본적으로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이나 견고성에서의 합리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신앙은 특별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격(personality)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으로 프롬은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없고 여러 환경에도 불구하고, 의견과 감정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생애를 통해서 지속하는 자아, 곧 우리의 인격(personality)의 핵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바로 이러한 핵심이며,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즉, '나'라는 존재를 믿고 자립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말을 증명하듯 프롬은 만약 이러한 자아의 지속성에 대해 신앙을 갖지 못하게 면 감정을 위협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된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 실존의 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단순한 신앙의 필요성을 떠나서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 받아들이려는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 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겪게될 수 있는 곤란과 좌절과 슬픔을 일어나서는 안 될 부당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이려면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전한다.
최종적으로 프롬은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이것이 부족할 경우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사랑은 이론이 아닌 활동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살펴본 사랑에 대한 정의와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필요 요소와 조건들을 살펴보았을 때, "과연 이걸 진짜 할 수 있나? 프롬의 말대로라면 우리 현대 사회에서는 실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하고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에 대해 프롬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본 현대 사회는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비록 자본주의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상당한 불일치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구조라는 점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을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대답으로 보고, 사랑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구조에 중요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프롬은 단순히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사랑이 개인적인 현상이 아닌 사회적인 현상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책을 마무리한다.
모든 활동이 경제적 목적에 종속되고, 수단은 목적이 되는 현대사회. 현대인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다고 프롬은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굉장히 눈에 띄었던 단어는 바로 '자동인형'이다. 현대인을 아무런 감정도 없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기계인형에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자극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비판하는 것에 한편 걱정스러웠으나,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에는 프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만 들어가도 피부로 느껴지는 외모지상주의와 물질지상주의. 그리고 당연하듯이 연애'시장'이라고 표현하는 것만 보더라도 더 말하기에 입이 아플 정도가 아닐까.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20세기 서양 사회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낱 시장적 가치로 매겨진 상품으로 취급되는 사람의 품격을 높이고 좀 더 '사랑'이 사회에 퍼질 수 있도록 실용적인 기술 함양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프롬의 사랑의 힘에 대한 믿음과 인류를 향한 신앙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글에서까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러분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좀 고리타분하고 융통성 없어 보일 수도 있는 프롬의 사랑의 정의가 이 글을 통해서 마음에 와닿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