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말이야
요즈음 우리 병원은 평소보다 북적거린다.
물론 요즘 일교차가 심하긴 하지만 다행히도 환자가 늘어 북적거리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 글을 쓸 시간도 없었을 테니까
병원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새로운 얼굴들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방금 다린듯한 빳빳한 새 가운
그 안으로 보이는 단정한 넥타이
매장에서 갓 꺼내온 듯 윤기나는 구두
꼿꼿이 편 허리와 긴장이 가득한 표정까지
이들의 정체는 바로 의대 실습생, 일명 PK
어느새 본과 3학년 PK들의 병원실습이 시작되었나 보다
병원에서 PK는 어떤 위치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내가 PK 때 생각했던 것과 지금 생각하는 것이 퍽 다르다.
3년 전, PK는 병원 안의 먼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한 농도를 유지하는 존재
너무 열심히도, 너무 대충도 아닌 중도를 걷는 존재
눈치껏 실습을 도는, 병원의 가장 아래 바닥인 존재라고 말이다
하나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어디 감히 PK 선생님들을 먼지라고 부를 수 있겠나
결코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병원에 배우러 오신 분들이다
물론 인턴도 일을 하면서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지만, 우리는 돈을 받는 사람들이다
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사람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돌이켜보면 PK 실습 1년은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생활 반경이 학교 교실에서 병원으로 옮겨지며 주위의 모든 것들이 변한다.
칠판을 보면서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교수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하고
나름 본과 3학년이라고 올라간 어깨가 저 바닥까지 추락한다.
성적이 좋은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친화력과 적극성이 성적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도 배우게 된다.
병원 안에는 의사 외에도 수십 종류의 직업들이 존재하며, 의사만 있다면 결코 병원이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배운다.
밤낮없이 일하는 의사선생님들을 통해 나의 미래 모습을 스포일러 당한다.
그와 동시에 '의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과 동경이 사라진다.
오히려 의사라는 직업은 '독이 든 성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또한 막연히 '인기과가 좋은과겠거니' 하는 생각은 '나와 잘 맞는 과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같은 경험을 수년, 수십 년 전에 하셨던 선생님들의 조언을 들으며 단순히 전공이 아닌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PK 실습 1년은 많은 것들을 도전해 볼 수도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PK에 들어가면서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다.
본과 3학년 때 만 할 수 있는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시작했던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젠 단순 활동을 넘어 취미가 되어버린 글쓰기
내게는 나이가 들어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잘 맞아 금세 친해진 친구 같은 존재이다
실습을 돌며 체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작했던 헬스 역시 비슷하다
스트레스를 정리하기 위해 요가도 해보고, 주말에는 이곳저곳 여행도 많이 다녔다
3일 만에 50학점이 결정되는 시험을 위해 미리 조금씩 공부해놓는 습관을 들이려는 도전 또한 성공했다
그 덕에 꽤나 괜찮은 성적으로 PK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또한 그 덕에 서울로 인턴을 도전해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PK 시절은 내 인생의 여러 가지를 바꾸게 된 중요한 1년이었다.
그래서일까 PK 선생님들을 보고 있자면 옛날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괜한 친밀감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듯하다
PK 선생님들이 있을 때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다. 밝아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레지던트 선생님들도, 교수님들도 모두 PK 선생님들을 반가워하시고 관심을 가지신다.
회진을 돌더라도 교수님들은 학생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담은 질문을 하시느라 인턴은 시야 밖으로 벗어난다.
교수님들의 애정은 엘리베이터까지도 이어진다.
학생 선생님 궁금한 거 있어요? 하나만 말해봐요
없던 궁금증도 만들어내야 하는 PK 선생님들의 고군분투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굴리는 학생 선생님의 옆에 서서 시선을 저 멀리 던진다.
저는 인턴이라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에게 관심을 갖지 말아 주세요.
오늘도 PK 선생님들의 그림자에 숨어서 무탈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PK 선생님들은 병원에서 열정을 과하게 불태울 필요가 없다
PK는 열정과 휴식을 잘 조율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실습 기간은 마라톤과도 같다.
처음에 열심히 달렸다가 중간에 지치기 십상이므로 본인의 에너지를 일정량 유지하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습을 아무리 열심히 돌아도 티가 잘 안 난다.
내가 일이 바빠서 그런지는 몰라도 PK 선생님들의 열정을 느낄새가 없다.
'존재'는 알고 있는데 그 선생님들이 지금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아니면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달까
인턴인 나도 그런데, 나보다 더 바쁘신 레지던트 선생님들, 교수님들은 어떠실지는 자명하다
가끔 CT나 MRI 킵을 하면서 PK들이 질문을 하면, 어 공부 좀 잘하는 친군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뿐 그 이상은 없다.
그러니 PK 생활에 너무 매몰되지 말기를 바란다.
돌이텨보면 PK 때 나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지만 조금 미련했던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허나 본인의 능력을 드러낼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발표 시간
PK 실습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발표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PK 실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 발표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져간다
내용을 잘 몰라도 발표를 잘하면 잘 알아 보인다
요즘은 마케팅의 시대이고, 발표는 마케팅의 기본이며 본인이라는 상품을 홍보하는 방법이다.
튼튼한 실력을 갖는 것 그 이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PK를 하며 깨닫게 되었다
외형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한다
둘 다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은 전적으로 나의 경험에 빗댄 것
지금 실습을 시작하는 PK 선생님들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생각할 것이다
올해 1년 동안 다양한 색깔을 가진 후배 선생님들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