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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문의 Dec 28. 2023

[병원인턴] 인턴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법

당직실에서 맞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두 손을 맞잡은 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로 가득한 거리

갖고 싶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상기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

그 모습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눈빛으로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님들

어디선가 들어봤지만 가사는 모르는 캐롤들이 흘러나오는 가게들

반짝거리는 전구, 가지각색의 장식들로 꾸며진 초록색 트리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눈송이에도 불구하고 따뜻함만 더해지는 크리스마스이지만 우리 인턴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당직 근무를 선다.


우리병원 입구에 꾸며진 장식

사실 공휴일에 당직 근무를 서는 것은 그리 놀라울 일도, 슬플 일도 아니다.

우리는 지난 여러 공휴일을 병원에서 보내며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달력에 빽빽하게 적혀있는 검은색과 빨간색의 숫자들은 우리들에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니, 생각해 보면 빨간색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검은 날에 쉬어본 기억은 인턴 야유회를 제외하고 기억을 통째로 뒤집어보아 탈탈 털어도 나오지 않으니까


매년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마다 전 국민의 이목을 사로잡는 이슈가 있다.

올해 평일인 날에 공휴일이 몇 개인지, 주말과 공휴일이 이어지는 이른바 '황금연휴'가 언제인지 또 며칠인지

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치는 날에는 손에 쥐고 있지도 않았던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긴 느낌에 기분이 불쾌해진나.

반대로 황금연휴가 있다면 아직 여행경비도 모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여행은 어디로 갈지, 비행기표는 언제 사야 할지, 어느 호텔에 묵어야 할지 온갖 행복한 상상에 빠진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작년까지 나의 이야기였으나, 올해 대학병원에 입사하고부터 남의 이야기가 되었다.

빨간색, 검은색은 더 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내 관심사는 그저 당직이냐 아니냐 일뿐이다.


어두운 병원 밝게빛나는 트리

공휴일에도 근무를 해야 하는 슬픈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은 전혀 없다.

인턴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다소 억울한 감정도 들었고,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 허탈감도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직업을 선택하면서부터 어느 정도 다짐을 했던 바가 있었고, 또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함께 당직을 서는 동기들끼리 서로를 다독이며 버티다 보니 공휴일에 일하는 게 시나브로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는데, 이럴 때는 호흡을 가다듬고 '오히려 좋아'를 외친다.

크리스마스같이 좋은 날, 아파서 응급실에 올 정도로 아픈 환자분들을 돌볼 수 있어서 좋고, 공휴일에 일을 하니 추가 수당을 받아 풍족한 다음 달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

다소 광기에 가득 차 보이지만 공휴일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을 인스타로 보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 위안을 하는 게 인턴의 정신건강에 이롭다는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말았다.


당직실 입구 산타풍선


생각해 보면 병원 안에는 트리도 있고, 병동마다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있다.

인턴 휴게실에서 캐롤을 틀어두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밖에서 보내는 것 못지않게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행동력 강한 우리 인턴장의 진두지휘 아래 작고 아담한 인턴 휴게실을 꾸미기 시작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이름 앞으로 매년 건물을 한 채씩 세워준다는 전설의 그 노래를 들으며 풍선을 불고 장식을 붙였다.

하지만 당직은 당직인지라 풍선 몇 개 불고 혹시 콜이 왔을까 휴대폰을 한 번씩 보기를 반복했다.

누구는 풍선을 달다가 응급실에 온 환자를 보러 가고, 누구는 책상을 세팅하다가 L-tube를 넣으러 병동으로 떠났다.

비록 순탄치 않았지만 결국 인턴 휴게실은 크리스마스의 대표색인 빨간색과 초록색의 꼬까옷을 걸치고 작은 크리스마스 파티 연회장으로 탈바꿈했다.

가톨릭 병원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낸 벽의 십자가가 연회장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으나, 반대쪽 벽에 붙어있는 '환자안전' 문구는 크리스마스에 너무 심취하지 말고 이곳이 병원임을 잊지 말라는 눈치를 주는 것만 같았다.


한껏 꾸민 인턴 당직실

장소는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는 음식을 준비할 차례

크리스마스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서로 나누어먹으면 좋겠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순간의 고민도 없이 배달의민족을 열고 크리스마스 맞이 배달음식을 시켰다.

파스타, 리조또, 윙 봉, 피자 등등

나누어 먹기 좋고, 파티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음식들을 위주로 골라서 시켰다.

그렇기에 치킨 대신 구운 윙 봉을 주문하는 기념비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는데, 바삭바삭한 치킨을 뒤로하고 구운 윙봉을 시킨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누구는 일을 하고 누구는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니 따뜻한 음식들을 실은 배달기사님들이 눈 오는 길을 뚫고 하나둘 도착하셨다.

생각해 보면 이 음식들을 만드는 사장님들도, 배달해 주시는 라이더님들도 오늘 출근을 하셨기에 이 음식이 나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도, 설 연휴에도, 추석 연휴에도 그랬다.

그렇다. 다들 쉬는 연휴라는 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다.

연휴에 쉬는 사람들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연휴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는 걸 이제야 인지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더니

이렇게 나도 조금씩 사회인이 되어가나보다.


직업을 갖고 직장을 다니면서 새삼 느끼는 것들이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늘 어떤 이유로 바쁘고, 어떤 이유로 피곤하며 어떠한 이유로 여유가 없다.

시험을 준비하느라, 일을 하느라 여타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들이 우리에게는 사치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정말로 순간의 즐거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즐거움을 참고, 내일의 기쁨을 참고, 모레의 행복함을 억누르며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고, 원하는 바를 얻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만이 바람직한 감정일까?

경쟁자들의 페이지는 넘어가는데, 실적은 커져만 가는데 나는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 건 우둔한 행동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즐기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습관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그 어떤 순간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뒷전으로 넘겨버린 작은 행복의 기회들을 놓친다면, 그 바쁨의 끝에 오는 무언가를 얻는다 해도 마음속 깊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또한 바쁘면 바쁠수록 관습을 소중히 여길 때 얻는 소속감과 안정감이 중요하다

특히나 매달 근무하는 과가 바뀌느라 봇짐을 싸 들고 돌아다니는 우리 인턴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하다.

시험이 며칠 안 남았어도 설날이 되면 떡국을 먹고,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추석이 되면 송편을 먹어야 한다.

그런 작은 행동으로 내가 이 문화권에 속해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크리스마스도 매년 병원에서 보낼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는 동기들과 일상의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면, 나도 웃으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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