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I의 인턴후기
Q. 인턴을 막 시작했을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때는 어땠었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어요. 걱정도, 설렘도 없었죠. 저 좀 강심장 같나요? 하하
업무를 시작하기 전, 저에게 인계를 해주었던 선생님께서 굉장히 친절하고 꼼꼼하게 설명해 주셨거든요. 그 덕분에, 출근 전날 이미 머릿속에 전반적인 하루가 그려졌어요. 도움을 많이 받은 만큼, 저도 올해 3월에 새로 들어오는 인턴 선생님들께 꼼꼼하게 인계해 드려야겠어요.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달랐죠. 출근하자마자 6시부터 정규 업무 콜로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어요.
'좀 힘들 거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죠. 정말 일이 ‘쏟아져서 압도당한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울려요. 물론 지금이야 무엇이 급한 일인지 알고, 그것들 먼저 해치우면 된다는 걸 알지만 갓 입사한 인턴이 그런 걸 알리가 만무하죠. 매일매일 제 안에 폭풍이 휘몰아치는 느낌이었어요.
아직도 생각하기만 하면 가슴이 떨리는 스토리가 있어요. 출근 첫날 진정 약물을 투여하고 MRI를 찍는 환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보통 진정 약물을 투여하는 경우, 의사가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인턴이 keep(킵)을 서거든요. 그렇지만 의사가 필요한 상황은 잘 일어나지 않아서 사실 CT keep, MRI keep은 인턴들에게 조금은 지루한 업무예요. 하지만 그날은 예외였어요.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고 몇 분이 지났을까요? 갑자기 환자의 심박수가 널뛰기하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 머릿속에는 'Code blue' 가 스쳐갔죠. MRI을 찍다가 심정지가 발생하는 일이 출근 첫날에 일어날 수 있겠구나. MRI 실에 의사는 저밖에 없었고 옆에 간호사 선생님은 저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물으며 판단을 내려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긴장, 스트레스, 부담감 때문에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어요. 저는 출근한지 하루도 안 된 새내기 의사였는데 말이에요. 다행히도 그 환자는 곧 괜찮아지셔서 별 처치 없이 MRI를 끝까지 찍고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요.
인턴도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의사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날이었죠.
Q. 힘들었던 기억은 무엇이 있나요?
병원마다 제일 힘든 턴이 다른데 제가 근무했던 병원은 내과 인턴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런데 과거가 미화되어서 그런가 인턴 업무 자체로 그렇게 힘들었던 적은 별로 없는것 같아요. 협조가 안되는 환자를 만나거나 병원 시스템의 비합리성이 느껴질 때, 또는 업무 외 개인적인 일들이 겹쳤을 때 등등
바쁜 인턴 업무에 이런 것들이 더해져서 힘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Q. 인턴을 하며 어떤 좋은 기억들이 있나요?
동기들과 보냈던 시간들이요. 퇴근 후 작문의 님과 기울이던 술잔, 노릇노릇 익어가는 고기가 아직도 많이 생각나요. 스트레스 받았던 일들, 기분 좋았던 일들, 고민하는 일들, 또 그저 의미 없이 시시덕거릴 수 있었던 일들까지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고 기운이 났어요. 병원에서 생긴 가족이나 다름없었어요.
이렇게 좋은 동기들을 만났건 제 인턴생활 중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Q. 과를 지원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나요?
저는 흔히 바이탈(vital) 과라고 불리는 과를 선택했어요.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죠. 사실 우리나라에서 바이탈과를 선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뉴스에서도 바이탈과의 힘든 현실이 매일같이 보도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요.
저는 학생 때부터 바이탈과를 지망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가 다가올수록 고민이 되었어요.
이게 정말 괜찮은 선택일까, 다른 길도 많은데 이 길을 선택하는 게 옳은 결정일까, 꼭 이 길이어야 할까
이런 고민은 저처럼 바이탈과를 생각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턴들이 하지 않을까요
운명처럼 하나의 과가 끌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정도는 다르겠지만 다들 저 같은 고민을 하고 치열한 생각 끝에 한 과를 선택하겠죠.
결국 저는 고민 끝에 바이탈과를 선택했어요. 이 선택이 앞으로 제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알 수는 없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Q. 훌륭한 인턴이란 어떤 인턴인 것 같나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일을 맡길 수 있는 그리고 맡기고 싶은 사람이죠.
저에게는 그런 사람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 이예요.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고, 늘 여유로운 사람이요. 실제로 그런 인턴들이 일도 잘하고 성적도 우수하더라고요.
여유는 자신감에서 나오고, 자신감은 실력에서 나오거든요.
Q. 순환근무는 어땠어요?
순환근무는 우리 의료원 최고의 장점이자 최고의 단점이죠. 모든 일에 장단이 있는 것처럼 순환근무도 그렇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병원마다 특징이 달라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어요. 다양한 병원 시스템, 동료들, 환자군에 대한 경험들 말이에요.
지금은 힘든 점들이 많더라도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Q. 인턴을 마무리하는 지금,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아쉬운 점이 많아요. 사실 세상만사 그 어떤 일이라도 돌이켜보면 후회나 아쉬움이 남겠죠. 인턴 생활은 남는 시간을 쪼개서 무언가를 더 하기는 힘들어요. 자기만 해도 곧바로 출근시간이 다가오곤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더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특히,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시간 될 때 만나자고 말만 해놓고 결국 보지 못한 친구들이 너무 많아요.
레지던트가 되면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바빠질 텐데..
지금 좀 더 많이 놀아야겠어요.
Q. 후배 인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전 질문에서 훌륭한 인턴이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 답했어요.
그렇다면 그 반대인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고, 자기가 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본인이 제일 힘들다고 짜증을 내고, 일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등등
위에 언급한 것들을 하면 안 된다는 건 누구나 알아요. 그저 아는 걸 실행에 옮길 수 있냐의 차이죠.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더라도 산더미 같은 일에 지쳐버리면 다짐을 지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주변에 긍정적인 사람들이 가득하려면 본인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여러분의 건강한 인턴 생활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