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출판사에 내 원고를 제안할 때 '출간 기획서'와 함께 '샘플 원고'를 보낸다. 이때 샘플 원고라도 원고는 원고이니 만큼 제목을 붙여야 하는데, 이때의 제목을 가상의 제목 즉 '가제'라고 한다. 그러나 가제가 최종 제목으로 선정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출판사와 여러 번 회의를 거치고 많은 수정의 과정을 거치며 책은 처음과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제목은 책의 얼굴이고 부제는 메이크업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독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제목이 매력적이어야 하고, 그 아래 위치한 부제는 적절하게 제목을 빛내주어야 한다. 내 취향의 얼굴이 대중의 취향이 아닐 수 있듯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제목이 독자들 혹은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목이 아닐 수도 있다.
책은 일기장이 아니다. 대중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취향을 이해해야 하고, 내 책은 그 누가 보더라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책의 출판 전 과정 중 제목을 정하는 것에서 가장 애를 많이 먹었다.
내 책의 가제는 <병원의 막내 의사, 인턴입니다>였다. 내 생각에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막내 의사'와 '인턴'이었다. 이 두 키워드 중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 가제를 통해 책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려 노력했다. 당당하게 출판사에게 가제를 붙인 샘플 원고를 보냈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출판사 측은 가제가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열심히 생각해 낸 가제의 빛이 바래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생각해 낸 기가 막힌 제목인데, 이게 맘에 안 든다고? 출판사가 감이 없나? 그러나 나는 일개 신인작가였고 상대는 출판의 전문가였다. 제목을 좀 더 연구해 보라고 하는 전문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던 나는 머리를 더 굴려보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인턴'은 당연히 병원에서 일하는 막내 의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턴은 병원에만 있지 않다. 병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인턴들이 있었다. 병원 말고는 다른 직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의 시야는 바늘구멍만큼 좁았던 것이다. 감이 없는 건 바로 나였다.
또한 막내 의사와 인턴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다. <병원의 막내의사, 인턴입니다>라는 가제는 역전 앞 같이 뭔가 어색한 느낌을 주는 문장이었다. 처음에는 이 제목이 책의 내용을 한 번에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해 고민의 시간을 가지니 내 가제가 가진 불확실성과 애매함이 더욱 눈에 띄었다. 원고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오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매일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 어떤 제목이 내 책의 제목으로 가장 적절할까. 출판사의 제안대로 베스트셀러들을 보며 비슷하게 제목을 지어보기도 했고, 유명한 드라마나 작품들의 제목을 오마주해 책 제목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책이 다른 책들이 닦아놓은 길을 좀도둑처럼 몰래 걸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들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시중에 나와있는 자기 계발 도서의 중요한 점들을 발췌하여 하나로 묶으면 내가 세계 최고의 자기 계발 도서를 출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거기에 몇 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얼마나 의미 없는 짓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책에 어울리는 제목이 다른 베스트셀러들에 있을 리 만무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경험과 생각으로 적어 내려 간 내 책의 제목은 분명 그 안에 있을 것이었다. 나 역시 몇 주의 헛발질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옳은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참고는 참고일 뿐, 결국에는 오리지널만이 당당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내 책은 열정 가득한 막내 의사의 좌충우돌 인턴생활기였고, 책 제목에 새내기 의사의 열정과 패기가 담기기를 바랐다.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의 가닥을 잡은 나는 열정이 느껴지는 온갖 문구들을 적어보았다. 열심히 하자, 집중하자, 파이팅, 가보자고, 열정 열정 열정, 해봅시다, 한번 해보자. 어? 한번 해보자?
불현듯 '한번 무엇 무엇하다'라는 문구가 가슴에 훅 와닿았다. 어떤 행위를 처음 하는 초보자라는 걸 드러내면서 동시에 열정이 가득하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게 바로 유레카의 순간인 건가? 나의 첫 책 제목은 이렇게 새벽녘에 모니터 앞에서 <의사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로 정해졌다.
출판사 측에서도 내 유레카 순간이 가져다준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의 제안을 고려하여 몇 가지 제목과 부제를 제시해 주었다. 나는 명확하게 선호하는 제목과 부제가 있으니 더 이상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제목과 부제를 보여주고 어떤 것이 제일 괜찮은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선택을 했고, 그들의 선택으로 자신감을 등에 업은 나는 조금 더 확신을 갖고 출판사에게 나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렇게 나의 책은 <병원의 막내 의사, 인턴입니다>라는 가제로 시작해 <의사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