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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기쌤 Mar 12. 2024

처음과 그 끝 무렵, 그리고 사람들과 마음

○○학교 생활을 마무리하며(2017)

 구에게나 잊지 못하는 순간은 있다. 2014년 2월 5일 오전 10시, 나는 이날 이 시간만큼은 내 생애에서 가장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그 시간은 하늘이 내가 지금 ○○의 아이들을 만나게끔 도와준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수년간 고된 임용고시 시절의 끝은 ○○에서의 생활과 맞닿게 되었다. 


  사실 오랫동안 임용고시 시절을 지내면서, -이건 많은 고시생이 그럴 것이다- ‘교사만 시켜준다면 그 어느 곳에 발령을 내주더라도 가겠다.’라는 마음으로 공부를 해왔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도 그 어느 산골이라도 보내주기만 한다면…… 이라는 바람이 합격 직전의 순간까지 있었다.


  그러나 강렬한 기쁨의 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현실감을 되찾게 되자, 설렘 반 걱정 반인 마음이 다가왔다. 20년 이상을 고향인 대구에서 살아왔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살아본 적도 없는 □□도에서 살아야 한다니, 기대도 되었지만, 부담도 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대학교 시절부터 공부하고 준비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내가 아이들의 공부와 생활을 지도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까지 더해졌었다.    

 

      이렇게 기대와 걱정을 한 아름 가지고 시작한 □□도 생활은 연수원을 거쳐서 실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연수원 생활을 마칠 때쯤 나의 첫 교직 생활을 하게 될 학교를 보게 되었는데 내 이름 석 자 왼쪽에 ‘△△ 교육지원청’이라는 단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라…… 한국사 책에서 봤던 유명한 △△ 선생도 아니고?                                             

      

  나의 중학교 시절부터 가졌던 꿈은 ‘역사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 붙였던 수식어가 더 있었다. ‘시골 학교’라는 수식어였다. 그렇다, 나의 꿈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는 역사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꿈이 무색하게도 자가용 하나 없고 31년 뚜벅이 외길 인생인 나에게는 대중교통이 어떨지부터 걱정이 되었다. 


  참, 사람 마음도 갈대 같지, 꿈은 그렇게 꾸고 그것이 실현되는 직전에 오게 되었는데, 고작 산골과 대중교통을 걱정하고 있다니. 갈대 같은 마음을 붙잡고 다시 이곳에서 만날 선배 선생님분들과 아이들을 상상해 보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희망과 봄날로만 가득하진 않겠지만, 어느덧 추운 겨울이라 입은 내 코트 품속에는 선배분들의 가르침과 보살핌 아래,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어렴풋이 스며들었다.


  수년간 고생(?)한 끝에 교사의 길을 시작한 터라, ○○중학교의 선배 선생님분들께 인사드리기 전날 부모님과 동생이 △△까지 동행해 축하의 자리를 함께한 뒤 이튿날이 되었다. 임용고사 최종 면접 때 입었던 짙푸른 색의 코트와 정장, 그리고 붉은 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지그시 바라봤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교사로서의 시작도 전의 감정만 계속 이야기했었는데, 이제부터 사람들 이야기도 해보려고 한다.     


  깊은 산속 사이 아기자기한 평지의 나지막한 오르막 초입에 있는 건물 몇 동과 흙바닥이었던 운동장을 가진 학교가 내가 처음 접한 ○○중학교였다. 이따금 불어오는 2월의 늦겨울 바람을 얼굴에 품은 채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교무실 문을 열었다. 사실 긴장을 좀 한터라 정신이 없어 내가 선배 선생님들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들의 시선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미 한두 번 보신 바는 아니셨겠지만, 새내기 막내를 따사롭게 바라보시면서도 과연 어떤 인물일까 살펴보시는 시선이 함께 느껴졌다. 한 분의 안내로 내가 근무할 책상에 앉았는데, -아쉽게도 실제로는 지금 앉은 자리가 아니었지만- 상상은 해 보았지만, 막상 사무실 책상을 바라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교육지원청에서 발령식이 있고 난 뒤 받은 임명장을 부모님 품에 안겨드렸을 때의 기쁨은 곧 며칠 만에 아이들을 만난다는 설렘과 긴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선생님이면서도 직장에서의 새내기 후배 교사로서 다른 선생님분들과의 직장 생활에 대한 기대와 걱정까지.


  글을 쓰다 보니, 아직 아이들을 만난 일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무척 글을 길게 썼다. 아마 이건 교직 생활, 그리고 ○○ 생활의 시작이 나에게는 남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드디어 새로운 만남의 달인 3월이 되어 입학식을 치르게 되었다. 남들은 ‘난 어떤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멋진 선생님이 되어야지!’ 등의 생각들을 한다지만, 난 당장에 처음 보는 아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라는 등의 눈앞을 일들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께서 1년 동안 함께할 교직원들의 이름과 맡은 역할을 한 사람마다 소개하실 때 내 차례가 되어서는 씩씩하게 인사들 했지만 내가 누군가의 선생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떨떨하였다.     


  이것이 나의 교직 생활의 시작이었다. 기쁨, 설렘, 걱정, 두려움, 얼떨떨함이라는 감정으로 출발했던 나였지만, 어느새 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에서의 생활만큼은 무덤덤해지고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교사가 한 학교에서 최고 5년 동안 근무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생각한다면 그 기간이 다 되어 가고 있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전체 교직 생활을 생각한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4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접하게 해주었고 나의 생활 모습과 학교와 아이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까지 서서히 바뀌게 해주었다. 


  아이들을 마냥 상냥하고 좋은 인상으로만 대할 수도 없다는 점, 결국에는 어른이라는 시선과 잣대로 아이들을 규정짓게 된다는 점,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하나하나 모두 관심을 쏟을 수 없다는 점, 때로는 아이들과의 생활 속에서 나 자신과 아이들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다는 점이 이 시간 동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 얼음물을 스쳐 지나가게 한 듯 차갑게 다가왔었다. 물론 겨울이 되면 대단한 추위를 가져다주는 이곳이긴 하지만, 옥갑산 아래 아우라지를 끼고 포근하게 감싸는 모습을 하고 있는 ○○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현장에서의 냉정한 현실은 서슴없이 나에게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국 포근함이 넘쳐나는 이곳 ○○과 ○○중학교도 역시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글의 시작은 설렘과 기대가 가득 찼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지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들과 더불어 어둠을 봤노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첫 학교인 ○○중학교에서 일과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이 사실은 내가 가진 아이들과 학생을 향한 마음과 그 실천이 의도 및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적지 않은 곤고(困苦)함이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중학교는 나의 교직 생활 중 시작점에 있는 학교이고, 이곳을 모교로 삼는 우리 아이들은 나의 첫 제자들이다. 이 점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지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일과 만나는 사람들은 모조리 내가 처음 겪는 일과 사람들이 되어 설렘뿐만이 아닌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역설적인 공간이자 시간이 되었다.


  선배 선생님분들께서는 -지금도 경험과 역량이 부족하지만- 아는 것이라고는 책으로 배운 전공지식이 전부였던 새내기 막내 교사인 나를 여러 방면으로 챙겨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물론 열심히 한다고는 했었지만, 때로는 부족한 모습을 보여 여러 실수로 죄송스럽게 해드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 시절에는 다들 그렇다는 말씀으로 보듬어주셨었다. 어떤 선배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나와 아이들의 연령차이기보다 더 간격이 있기도 해서 학교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가 있기도 하였지만, 이 모습 역시 겪어왔던 시대 분위기와 경험의 누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도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고 생각의 틀이 더 멋진 선배 선생님들도 계셔서 많은 배움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는 내가 사랑을 쏟게 했던 ○○중학교 아이들이었다. 우리 ○○중학교 아이들이 수업 때든 점심시간이든 그 언제든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그만큼 이 아이들에게 마음이 갔음이라. 이렇게 아이들이 참 좋다는 점과 이 아이들이 웃는 학교가 되었으면 하기는 바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같다. 하지만 4년 동안 아이들과 나라는 교사 그사이를 어찌 좋은 일들로만 채울 수 있었겠는가.


  마음이 가는 만큼 말도 가는 법인지, 아이들에게 대화도 많이 걸고 때로는 잔소리(?)도 하게 되었다. 때로는 따사롭게, 어떨 때는 잔잔하게, 그리고 이따금 간지러운 장난스러움으로 다가갔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엄한 분위기를 이루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발생하는 사안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과 분위기까지 여러 경험을 같이 공유해야 했다.


      이렇게 수많은 상황과 경험을 공유했던 우리 ○○ 아이들. 해맑은 미소를 서로 나눌 때도,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대해야 할 때도 우리 ○○ 아이들은 항상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이곳에 있어 주었다. 새내기로 시작한 시점부터 올해까지 겸임 수업을 나가는 ○○고등학교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71명의 아이를 만났었는데 각자 천차만별인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었으나 자기가 있을 자리에 있어 준 것은 항상 같았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기다려 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 마치 공기가 당연히 내 주변에 있어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듯이 그 사실 자체로 너무나 고마운 것이었다. 이 부분은 잠시 망각하고 있을지언정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런 생각을 나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언젠간 나는 어려운 일이 아이들과의 사이에 나타나게 될 때마다 실망이 학습되어 아이들을 기계적‧사무적으로 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지게 해준 이들이 바로 우리 ○○의 아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우리 ○○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들도 있었다. 다른 도시지역 아이들과 나름대로 다르게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 우리 ○○ 아이들이지만,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하며 자율성을 키웠으면 했다.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좀 더 자라도록 돕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고민이 늘 있었다. 적어도 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이해를 구하고 그 바탕으로 아이들이 자신의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과제를 해결하고 본인들의 해야 할 일들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 상황, 실천은 따로 놀기 마련인가 싶다. 위와 같은 마음이 원치 않은 상황을 만나면 생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실천과 행동하게 되어 버리기 십상이었다. 이런 점들이 늘 나를 스스로 아쉬워하게 했다. 마음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아쉬워하게 했던 일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마음과 아이들 사이의 간격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은 경험들이 종종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간격 사이를 메우기 위해서 애를 먹기도 했지만, 애당초 아이들과 마음 사이에 간격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를 메우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수업에 대한 기법과 기술, 각종 상담 기법, 행정 처리 능력 등들도 정말 중요하고 갖춰나가야 하지만, 아이들은 결국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채워갔다. 마음과 아이들의 간격을 채우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멀어진다는 것은 그 뒤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한 교사만이 아닌, 행복한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아이들이 함께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점에서 나는 무척 우리 ○○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내가 다가갈 수 있게 늘 그 자리에 있어 줬고, 아이들 나름대로 방식과 표현으로 내 마음을 받아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설령 마음을 받지 않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아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줄 수 있게끔 해줘서 고맙다는 표현도 함께. 어느 정도는 선생님이라는 이들은 외(짝)사랑도 하게 되는 존재이니까. 티 나지 않게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중학교와 선배 선생님분들, 그리고 우리 ○○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가고 있고 언젠간 시간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도 모른다. 만남이 있다면 이별 또한 존재하므로. 아쉬움이 많아지겠지만, 그 아쉬움을 새로 만날 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웃음으로 갚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4년 동안의 ○○ 생활 동안 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얼떨떨하게 시작한 나의 첫 수업, 체육관에서 처음 본 아이들에게 말을 붙이러 가던 걸음, 독도 과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아침과 저녁으로 같이 공부했던 일들, 아이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던 시간, 따스한 햇살 아래 야외 수업을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억 등등……. 



      내 글의 첫 상당 부분은 ○○중학교에 가는 과정에 할애하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아마 첫 학교가 나의 교직 생활의 매듭을 지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첫 학교인 ○○중학교는 앞으로 방향이 정해질 교사라는 틀의 기본이 되어주었다.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찾아가 보면 너른 들판과 포근한 풍경이 펼쳐지는 ○○과 같이 우리 아이들과 ○○중학교는 마음과 마음이 맞닿게 되면 넓은 마음과 포근한 정을 나눌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어느 곳을 가든지 넓은 마음과 포근한 정이 있는 학교와 아이들을 만나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나의 방향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 ○○중학교와 ○○ 사람들이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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