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만의 추석

청춘과 자전거 - 제주도 라이딩 1일 차 完

by chldew

"저희들끼리만 먹기 그래서, 다 같이 먹으려고 하는데 오실래요?"


화끈거림과 허기는 별개였나 보다.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바깥을 보니 해는 점점 지고 있었다. 방이 그렇게 밝지 않았기 때문일까. 저무는 속도에는 현실감이 붙었다. 핸드폰 화면 좌측 상단에는 브이를 머리에 인 수화기가 있었다. 슬라이드로 부재중 전화 내역을 확인하니 다섯 통이 넘었다. 시간은 여섯 시 반, 추석은 반도 안 지났다. 지금쯤이면 가족들도 나름대로 음식들을 즐기고 있으리라. 같이 즐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먹어준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렇게나마 먼저 독립한 동생이 추석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발은 1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자 잠이 서서히 달아났다. 이 쪽으로 오시라는 말을 듣고서야 전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야외 테이블은 한가위답게 푸짐했다. 닭백숙 한 냄비와 모둠전 한 소쿠리가 있었으니까. 송편은 없었지만…… 송편이 없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매년까지는 아니지만 추석에는 친척분의 떡방앗간 일을 도왔으니까. 송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 과한 거라 생각하고 있기도 했고. 스태프 분 어머님께서 준비하신 음식이셨기에 더더욱.


멤버들은 4~5명이라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적응하기 힘들어했으니까. 나이대가 비슷하다면 그나마 나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랬다. 모 플랫폼 서포터스 활동 발대식 때였을까? 플랫폼에서만 소통하던 사람들을 보자마자 한동안 어버버했다. 감사하다는 말만 몇 마디 하거나. 나이대가 워낙 다양했으니까. 그러다 자기소개 때, 가장 먼저 찾은 건 물이었다. 그것도 500ml짜리. 받자마자 한 번에 다 마셨음에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일까?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 다들 나이가 비슷하거나 그랬으니까. 많아봐야 30대 초반 정도? 여기 오기 전에는 무엇을 하다 왔냐 정도의 이야기야 나오겠지만……. 그래도 그것들로 위축이 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뭘 해야 한다는 식의 잔소리를 하는 어른들은 없었으니까. 뭘 하다 왔는지에 대한 얘기들이 비교와 동떨어진 느낌으로 나왔기에 더더욱. 그 이전에,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들을 하려 했다. 어떤 삶을 살았든 한때마나 그 일에 열정적이었던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그게 잘못된 길이든 올바른 길이든.


초심과 관련된 경우라면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치볼드 크로닌의 『성채』의 주인공 앤드류가 대표적이다. 한때는 부조리한 의학계를 바꾸고자 권력에 손을 내밀었으나, 결국은 자신이 비판했던 의학계와 동일한 노선을 탔던 그를 바꾼 건 아내의 일갈과 몇몇 사건들이었다. 이후 수많은 것들을 잃었음에도 그는 법정 싸움에서 승소한다. 의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비의학계 종사자들을 변론에 언급함으로써. 이후 그가 향한 곳은 아내의 묘였으며 그날 하늘은 맑았다는 언급으로 작품은 끝이 난다.


이런 느낌은 대중매체에만 한정되지는 않으리라. 독재자나 독불장군은 물론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그런 순간들이 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순간들이나 존재들이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면 더더욱 그렇고. 앞서 언급한 대중매체 또한 그런 모습들이 없었다면 반영이 되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정말 좋은 대중매체의 경우는 더더욱. 故 이외수 선생이 그랬던가? 좋은 작품에는 교훈과 재미, 유익함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열정은 이들 중 어디에 해당할까. 그리고…… 나는 한 번이라도 열정적이었던 순간이 있을까?


학생 때 열정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텍스트를 토대로 현대인을 어떻게 피로로부터 회복하고 치유할지를 연구했을 때에는 더더욱. 당시 인상 깊은 문장들 중 하나로 꼽은 게 열정과 관련된 문장이었는데, 그때 열정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있었다. 뚜껑을 따지 않고 가열하는 캔. 아직 열리지는 않았으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비유가 다른 연구회 회원들에게도 인상적이었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도 그런 모습들이 있었기에 더더욱.


실제로 좋아하는 수업에서는 정말 치열하게 덤비곤 했다. 생각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문학 관련 수업. 전공은 그와 유사하기는 했으나, 이 쪽 일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 적이 많았다. 오죽하면 얘만 수업을 듣는 것 같다니 너는 너무 많이 대답했으니 다른 분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냐니 하는 말이 나왔을까. 추후 과제를 제출한 뒤에 받은 피드백에서도 왜 이렇게 했는지를 메일로 다 말했을 정도였고. 그래서일까? 언젠가 책을 내고 교수님께 보내려고 메일을 했을 때도 인상 깊은 아이였다고 기억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이 쪽과 관련이 있는 열정은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 내내 모기 소리가 들렸으니까. 가끔 짝짝 소리가 났으나 손바닥에는 땀을 빼면 묻은 게 없었다. 굳이 모기를 잡지 않아도 당장은 가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서 스태프들과 다른 분들의 이야기로 열정을 돌렸나 보다. 이 여행의 의미가 사람들과의 만남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준비했던 술들이 빨리 떨어진 것도 그래서일까? 여기에 참여한 비용을 지불할 시간이 되었다. 막걸리 몇 병. 기왕이면 방금 전에 먹지 않은 걸로.


덕분에 이야기는 흔든 막걸리처럼 더욱 진해졌다. 어쩌다 제주도에 왔는지나 제주도에서의 삶 같은……. 대부분은 일상에 지쳐서 한동안 쉴 생각으로 왔다 말했다. 마케팅이나 은행원 등등. 이들 또한 부러운 삶을 살았지만 딱 한 명, 오늘의 반찬을 준비한 남자 스태프 한 분의 이야기가 제일 끌렸다 그분은 윈드서핑을 좋아하신다 했다. 그래서 제주도가 바람과 파도가 좀 있으니 여기서 타면 될 것 같다 생각했다나. 근데 비가 많이 내린다는 사실까지 간과한 게 문제였다. 실제로 여기 와서 윈드서핑을 한 게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고.


그래도 여기도 나름 좋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근처 치킨집 사장님이 통닭을 들고 숙소를 찾으셨다. 이 분도 당신과 비슷한 이유로 여기로 오셨다나. 뭐가 되었든 이런 식의 태도를 보자 완전히 경계가 풀렸다. 취직한 적이 없다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었고. 제일 젊었던 데다 이런 삶의 태도 또한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약간의 거리를 두다』가 생각났나 싶다. 약간이라는 말이 얼마인지를 알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너무 멀면 아닌 것 같고 가까우면 바람이 안 통하니까. 가족과 친척 관계가 어려운 건 그래서일까.


타인은 이런 점에서만큼은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우니까. 모 게임 속 등장인물의 말처럼…… 모든 건 술을 섞으면서 시작했다. 청주와 밑에 가라앉은 것이 섞여 하나가 되었으니까. 제주도 한 달 살이의 실제와 상상부터 취직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각자의 고민 등등. 이들은 개별적으로만 보면 영 아니다 싶다. 청주나 밑에 가라앉은 부분만 먹으면 막걸리의 맛이 제대로 나지 않듯. 하지만 이들이 섞이면 막걸리 맛이 난다. 앞서 말한 모든 이야기들도 그렇고. 낭만이니 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만남이 있고, 연을 맺은 사람을 술과 같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올라오는 취기를 따라 오른 계단에서 바라본 하늘은 그날따라 더욱 빛나고 바다는 멀리 있음에도 크게 소리를 냈다. 섬집 아기라는 노래를 떠올리게 만들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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