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어"
오전 11시 반 예식 시간에 맞춰 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만지는 내 손 끝에는 나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떨림이 가득했다.
서른 중반에 접어들며 숱하게 다니게 된 결혼식이라는 행사를 앞두고 내가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있었나.
'내 결혼식도 아닌데 뭐'
긴장을 풀어보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아래서 기다리던 친구 차에 올라탔다.
브루노 마스의 '24K Magic'이 신나게 흘러나오는 식장,
준비해 온 가벼운 댄스로 버진로드를 신나게 내지르는 오늘의 주인공 신랑과 신부,
진심 어린 축하를 담아 그들에게 보내는 하객들의 박수갈채.
여느 때와 같이 가벼운 목례로 낯익은 회사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든 순간 나는 괜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야 설마 왔겠냐~ 올 가능성 30% 이하. 여기 음식 잘하네~ 편히 먹어 얼른."
"그래~ 여기 양갈비랑 와인 무슨 일이야. 축의 더 하고 와야 되나ㅋㅋ"
긴장을 풀어보려는 실없는 농담과 맛있는 음식들 앞에서 단순한 내 얼굴과 표정엔 곧바로 미소가 흘러나왔고, '다음 접시엔 무엇을 담아야 하나', '오늘 누가 또 하객으로 오셨나' 혼자만의 상념에 빠지려는 찰나 너가 보였다.
후식 섹션 가지런히 놓인 디저트와 과일들 앞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도가니탕을 바들바들 들며 수박을 집어 담던 너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나타났다.
여느 결혼식장 뷔페에서 볼 법한 흔한 풍경 속에 6년을 매일 봤지만 한동안 보지 못했던 너가 나타났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안정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갑작스럽고 모질겠지만 짧지 않은 시간 고민해 왔던 부분이고 우리 이제 그만 하자."
두 번의 헤어짐을 품고 나아가던 6년 연애의 끝을 직감한 너와 나는 너의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서 더 이상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들, 그 이유들 뒤에 숨겨진 서로의 진심을 하나둘씩 꺼내며 마지막 조우 앞에 세상이 무너진 듯 흐느꼈다.
끝없는 흐느낌 속에서 나는 우리가 서로의 눈물 앞에 경이 또는 미안함보다 미어지는 마음만 커지는 것을 느꼈고, 더 이상 너를 잡을 수 없었다.
카페에서 나온 나는 차마 너를 보낼 수 없었고, 인근 산기슭에 차를 대고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우리는 각자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리고 이별 앞에 굳은 다짐을 새기고 있었다.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어."
기나긴 침묵과 쏟아지는 눈물 끝에 너가 나지막이 내뱉었던 한마디였다.
그리고 너는 달빛 가득한 눈물을 흘려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얼마나 너에게 고마운 사람인지.
안정적인 일상만을 생각하던 너에게 새로움과 놀라움이 가득한 다른 세상을 보여준 나의 노력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을 회상하면 행복한 날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걸.
읊조리는 듯한 너의 고백이 이어지는 와중엔 '그럼 우리 다시 잘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 한참을 헤매었다.
목구멍 끝으로 그 생각이 튀어나갈 뻔한 순간, 너의 구슬프고 진심 어린 고백은 끝이 났고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단 한 구절만 간신히 내뱉을 수 있었다.
불안함과 실체 없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너의 아픔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고, 여전히 너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지 못한 나였기에.
"응 나도 마찬가지야."
'언젠가 다시 볼 인연이었잖아'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최대한 무덤덤한 생각을 대여섯 번 되뇌고 너에게 다가간다.
내가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너도 아는 듯했고 긴 시간을 함께한 덕에 그걸 눈치챈 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창 부르듯이 너에게 아무렇지 않은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가장 먼저 너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살짝 스친 듯한 당황스러움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너의 미소가 보였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고 참으려 했다가 이내 포기해 버리는, 입꼬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웃음이 너의 맑은 눈동자와 하나가 되는 그 미소. 오랜 짝사랑 앞에 선 여고생 같은 그 미소에서 나는 남모를 안도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식사가 끝나고 커피 한잔하자는 약속을 잡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너와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메마른 저수지에 다시 흐르는 강물을 황무지의 저 깊은 곳 갈구하는 무언가가 빨아들이 듯이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지난 1년을 쉼 없는 대화로 흡수하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시 신도림역에서 시작된 대화의 끝은 11시 사당역에 도착해 있었고, 기약 없던 재회 앞에 흥분한 너와 나는 웃음과 눈물로 얼룩진 이 대화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보내고 안정감을 준다는 그 사람을 만난다고 했고, 나도 달라진 삶의 태도와 함께 적극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했다.
서로에게 거슬릴 수 있는 그런 사실들조차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던 기나긴 대화는 사당역 토요일 막차라는 압박 앞에 조금씩 끝을 향해 갔고, 이윽고 너의 입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고 선명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