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
"저 뒤에 부서 선배님들이 여러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본부별로 본인 선배들 찾아서 질서 있게 퇴장 부탁드립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같은 팀 대리님께 깨진 2년 차 막내 사원인 나는 앞으로 펼쳐질 나날들은 꿈에도 모른 채 너가 있던 신입사원 교육장 뒤 편에서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고 있었다
'인마 결국엔 만났네 ㅋㅋ 둘이 잘되면 소개팅이나 구걸해야지'
'오 좋은데 취업했네, 한동안 힘들었었는데 다행이구만'
나는 지인들의 이런저런 소식에 잠시나마 회사 일은 잊은 채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툭툭)
"저기요.."
"네?"
차례가 온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낄낄대던 나는 우리 부서 이름을 대며 신입사원이라고 수줍게 자기소개를 하는 너를 처음 마주했다.
교육장에 가는 내내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대학 때도 부담스러워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던 여자 후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걱정이 한아름이었다.
하지만 너를 본 순간 그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 멋진 선배로 보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본부로 돌아가는 카트 위에서 너의 사회초년생 정장을 두고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고, 고작 일 년 더 다닌 회사에 대해 자조 섞인 의미 없는 조롱을 하며 난 후배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듬직한 선배로 보이고 싶었다.
MZ의 밀레니얼만 있었던 그 시절, 너의 출근 둘째 날 우리는 양갈비 집에서 환영회식을 했고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 가운데 비로소 너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고기가 구워지는 뽀얀 연기 뒤로 너의 환한 신입사원 미소와 웃음소리가 내 시선을 채웠고 한두 잔 취기가 오르는 와중에도 회식 분위기를 간신히 따라가는 너의 웃음소리는 내 귓가에 맴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대학생 새내기 시절 거대한 설렘 앞에 꼼짝하지 못하고 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던,
그럼에도 아쉬움과 풋풋하고 앳된 사랑이 맴돌았던,
그 시절의 그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매주 주말만 되면 본가가 있는 서울을 다녀왔지만 연고없는 인천으로 넘어와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이 잦은 회사생활은 나를 지치게 했다.
술에 의존하여 잠을 이루는 날이 많아졌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간신히 건강한 일상을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와중 찾아온 너였기에 이 감정이 과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른 것인지, 둘러싼 환경이 나를 몰아가는 것인지 명확히 알기 어려웠다.
사랑 또는 누군가를 원한다는 감정은 숱한 연애를 겪은 후에도 여전히 어려웠고, 그 혼란스러움은 너를 대하는 나의 모습에 그대로 입혀졌다.
주니어 회식이라는 타이틀 하에 너를 불러내었던 11월의 어느 날, 차가워지는 날씨 앞에 모두들 몸도 마음도 꽁꽁 싸매었지만 너를 향한 나의 마음만큼은 항상 두 발 벗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깃집을 나와 같이 마신 사원 2명을 집에 보내고 너가 택시를 부르려는 찰나, 난 취기에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바로 세우고 너에게 외쳤다.
"닭발 좋아한다 했지? 여기 떡볶이랑 닭발 시켜서 나랑 얘기 더하자!"
너와 얘기를 좀 더 하고 싶다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들렸을까, 집에 가기 싫어서 후배 붙잡고 한잔 더하려는 선배의 꼬장으로 보였을까.
"네 좋아요!"
다른 생각과 고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너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친 화답에 나는 기회가 왔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고 그렇게 네 손을 잡아 이끌고 들어간 술집에서 두 잔째 바로 기억을 잃었다.
기어서 들어간 자취방에서 겨우 다시 기어나온 다음 날 아침,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지만 떠오르는 건 단 두 가지였다.
나를 깨우는 너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에 내가 임종을 앞둔 환자마냥 간신히 꺼냈던 한마디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한다...'와 코인노래방에서 잘 부르지도 못하는 실력에 목놓아 부른 임재범의 '고해'.
혼란 그 자체였던 감정이 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짐시 튀어나온 것이라고 치부하였다.
결국 전날 밤까지 호감 표현을 쏟아낸 나는 미친 사람처럼 다음날부터 너를 피해 도망다니기 시작했다.
끝나고 잠시 얘기 좀 하자는 너를 야근, 동기 약속을 핑계로 두어번 떨쳐냈고, '저도 선배가 좋아요'와 그와 반대인 모든 말들로 양분되는 반반의 확률에 쫓기어 소심하고 못난 선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마음은 항상 너를 향해 있었다.
입사 새내기의 잦은 술자리 다음날 책상에는 항상 꿀물이나 숙취해소제, 그리고 내 짧은 쪽지가 있었고, 훗날 너가 감동을 받았다고 여러 번 얘기해준 내 1년차 업무 다이어리와 긴 편지, 사과주스가 있었다.
출장과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도 나는 너를 챙겼고, 너는 그런 나와 시시각각 커져가는 네 마음 속을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그렇게 연말 연휴가 다가왔고 딱히 뭐가 없었던 너와 나는 눈치게임 하듯 중간중간 연휴 계획을 묻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들고 돌아오는 길, 나는 성인이 된 이후 매년 새해 첫 해를 보러 집 밖을 나선다는 이야기를 팀원들 앞에 흘리며 네게 텔레파시 비슷한 무언가를 보냈고 그날 저녁 운동 후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내 핸드폰엔 너의 짧막한 카톡이 와있었다.
"우리 새해 보러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