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울진까지
2019년 12월 31일 저녁, 그렇게 내가 살던 동네 어귀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가로등 없이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던 긴 겨울밤의 시작은 그날의 만남이, 아니 우리의 시간이 어디를 향할지 모른 채 스멀스멀 올라오던 나의 두려움과 닮아 있었다.
저 멀리 한 겨울 추위에 중무장을 한 너가 천천히 걸어왔고 나는 힘차게 조수석 문을 열고 너를 맞았다.
찬 공기와 손바닥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으며 차에 올라탄 너의 밝은 표정에 나의 두려움은 곧바로 설렘으로 변하였다.
그렇게 신입사원 교육장에서의 첫 만남으로부터 채 세 달이 흐르기도 전에 너라는 존재는 나의 모든 것을 사로잡았고, 나 또한 아무렇지 않게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녁 먹었어? 내려가는 데 오래 걸릴 텐데, 간단히 저녁이라도 먹고 출발할까?"
그렇게 우리는 닭볶음탕이 유명하다는 주변 식당을 찾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닭볶음탕을 주문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사무실 밖 만남에 주문과 동시에 나온 닭볶음탕의 닭다리를 너의 앞접시에 놓아주기까지의 시퀀스가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지금 출발하면 거의 새벽 세시가 다되어서 울진에 도착할 것 같은 데 가서 뭐 하면서 일출을 기다릴까. 밤새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내려가는 내내 피곤할 텐데 옆에서 안 자고 계속 떠들어줄게. 요즘 회사에 같이 일하는 선배가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아서 너무 짜증 나네.
여느 평범한 연인들이 할 만한 대화가 이어졌고, 이 정도로 우리 사이가 편안해졌구나라는 뿌듯한 기분이 들 때쯤 우리의 닭볶음탕은 바닥을 보였다.
거진 6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날의 공기와 너의 표정이 선히 느껴지는 까닭은 식사 내내 시종일관 나를 배려 깊게 바라보고 대해주었던 너라는 사람에 있었을 것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든든한 배를 부여잡고 울진으로 향했다.
휴게소에서 산 더블 샷 아메리카노와 맥반석 오징어인지 호두과자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 주전부리(아마 과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 일출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게 된 너의 설렘 가득한 조잘거림 덕에 내려가는 길이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가장 크고 편안한 호감을 품고 있었던 두 남녀는 연고 없던 회사 근무지를 벗어나 처음으로 둘만의 무박 2일 여행을 떠났고, 그 시간을 둘만의 이야기로 채울 준비를 마쳤다.
"넌 어떻게 생각해?"
울진으로 향하는 새벽 고속도로 위의 대화는 그 시작과 끝이 다양하게 맺어졌지만 일관된 주제는 하나였다.
새로운 사람과 연인 관계를 이루어 맞춰 나갈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인가.
나는 두 사람의 합과 함께 하는 순간의 행복함을 얘기했고 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의 깊이를 얘기했다.
둘만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나눈, 연인 관계라는 주제에 대한 우리의 첫 담화는 이후 이어질 5년 시간에 대한 암시이자 이제 막 불기 시작한 천공의 바람이었다.
새벽 어스름 도착한 울진에서 우리는 세찬 겨울 바람과 진한 먹색의 밤바다를 마주했다.
해가 뜨기로 한 시간까지는 여전히 서너 시간이 남아있었고 이제 막 차 안의 공기가 편해지기 시작한 그 무렵, 우리는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덕에 차창에 몰아치는 칼바람을 뒤로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졸린 눈으로 눈앞의 히터 버튼을 요리조리 돌리며 최적의 차량 내 온도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인지 그냥 잠이 많은 덕인지, 두꺼운 겨울 옷 속에 몸을 파묻은 너는 갓난아기처럼 깊은 숨을 몰아쉬며 단잠에 들었다.
나 역시 장거리 야간 운전의 여파로 졸린 숨을 고로 내쉬며 오른쪽 조수석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단정한 시야에 너를 담은 채로 잠에 들었다.
한겨울 동해 바다의 매서운 추위는 우리의 단잠을 그냥 두지 않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에 우리는 해맞이 두어 시간 전 일어나 망양정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인파가 제각기 다른 사연과 기대를 안고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우리도 이곳저곳 둘러본 다음 소나무 한 무더기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바다 앞 정자 난간에 기대어 섰다.
나는 겨울 패딩 모자 속에, 너는 군밤 장수 모자 속에 머리를 깊게 파묻었고, 붉은 기운을 서서히 흩뿌리며 승천하는 2020년의 새해를 기다렸다.
서로의 어깨와 풋풋한 감정에 기대어 새해를 기다리던 그 시간과 대화는 지금도 나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깎아내지를 것 같이 아득한 동해의 수평선 끝에 천천히 차오르던 새해의 충만함은 맞는 이들의 마음속에 다양한 감정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는 내게 뜨거우면서도 안정적인 우리의 앞날을 너에게 약속할 결의를 심어주었다.
"너라는 사람이 좋아.
내가 너를 통해, 너가 나를 통해 더욱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고 싶어."
잔잔한 고백 앞에 계속해서 타오르던 붉고 찬란한 해는 보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간지러운 감정은 물론, 앞으로 쓰여나갈 시간에 대한 깊은 설렘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울진 앞바다에서 우리는 서로의 작품이 되어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