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시대 <삼국유사> 속 효를 다시 생각하다.

똘맹이 인공지능을 만들면서

디지털생활박사 첫 영상

1. 실패의 연속

작년에 삼국유사 속 효(孝)에 관한 논문을 처음 투고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끝까지 마음을 졸이게 될 줄은 몰랐다. 심사평은 언제나 성실하고 진지했다. 그러나 결과는 세 번 연속 ‘게재 불가’였다. 나는 현대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른 연구자들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삼국유사를 드나드는 경향이 있다. 고전의 정전보다는 소통하는 현대적 텍스트로 늘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너무 많이 있어 왔기 때문에 나는 게재불가가 사실 무섭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살아오면서 모든 상황에서 한방에 된 것보다는 기본 재수이상이다. 삼수도 많고 사수도 많다. 그래도 절대 굴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다행히 나에게는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기가 돋는다. 반드시 논문을 발행하겠다는 알 수 없는 투기가 마음속에서 생기곤 한다.

똑같이 ‘효’를 말해도 누군가에게는 시대착오적이라 느껴졌고, 또 누군가에게는 당위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나는 그저 한국적 정서와 불교적 인식 속에서 효가 어떻게 변주되어 왔는지 탐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논문은 계속 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올해. 극적으로, 정말 간신히 실리게 되었다. 마치 논문 자체가 나에게 작은 수행을 요구한 듯, “효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2. 삼국유사 속 효자들

삼국유사 속 대표적인 효자들을 생각한다.

김대성의 효, 몸을 내어주는 자식들, 그리고 일연 스님

논문 속에서 나는 『삼국유사』의 효 설화는 단순한 가족 미담이 아니라, 오늘의 돌봄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성찰하게 하는 자산이라고 말했다. 김대성·손순·진정 스님 등의 사례를 통해 효가 가족 중심의 의무를 넘어 공동체 연대와 영적 유산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이야기했다. 또한 진표율사와 향득 설화를 통해 효가 타율적 희생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제도적 공동선으로 전화될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일연의 삶을 바탕으로 자율성과 헌신이 조화되는 새로운 효 윤리를 제시하며, 초고령사회에서 효가 구조적 연대와 돌봄 책임의 윤리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요지는 삼국유사 속 효 이야기 안에는 사회적 돌봄과 공존의 효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의 효를 볼 수 있다.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한다”는 발원으로 불사를 일으켰다. 이 발원은 단순한 효도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존재의 윤리였다. 효는 특정 시점의 행위가 아니라 시간의 강을 건너 부모에게 되돌아가는 마음이라는 것을 김대성은 보여준다.

그리고 자식을 ‘생명의 일부’로 본 옛사람들의 극단적인 효―이를테면 자신의 살을 베어 부모에게 공양하는 이야기들이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무척 섬뜩하다. 그러나 그 서사들 속에는 육신보다 관계를 중시하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살을 바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친 것, 존재의 근원을 되돌려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노년에 이르러 노모를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국사라는 직책을 내려놓는다. 기록 속 일연은 역사적 거장이라기보다, 그저 부모의 곁을 지켜드리고 싶은 소박한 아들에 가깝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효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의 방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오늘의 우리에게 효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효를 말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것이다.

효를 말하면 너무 옛날이야기 같다.

하지만 효를 말하지 않으면 마음의 윤리 하나가 비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효’를 다시 쓰고 싶었다.

그 열쇠를 제공한 것이 바로 AI 상상력이다.

AI 효돌이

작년부터 학생들과 함께 “효를 AI에 심어보자”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일명 AI 효돌이 프로젝트였다. 실제로 시골 노모 옆에는 전라도 사투리를 하는 효돌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일반적인 정보 제공식 로봇이라 아쉬움이 많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프로젝트 제안을 했다.

학생들이 만드는 효돌이는 깨비송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님과 노년층을 돕는 작은 인공지능 캐릭터이이다.

효를 “감시나 복종”이 아닌

“관심·따뜻함·일상적 배려”의 감정으로 재해석하는 시도였다.

학생들은 깨비송이를 단순한 챗봇이 아니라

감정 케어·약 복용 리마인더·안부 인사·건강 체크를 하는

작은 ‘디지털 보호자’로 설계했다.

여기서 나는 깨달았다.

옛사람이 부모 곁에 초막을 지었다면,

오늘 우리는 부모 곁에 AI를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의 형태는 달라지지만 방향은 같다.

깨비송이는 도깨비와 학교 마스코트인 눈송이가 합쳐진 이름이다.

학생들은 도깨비의 장난스럽고 엉뚱하지만 정이 많고 의리가 깊은 존재라는 점에 주목했다.

깨비송이는 혼자 계신 어르신 옆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한다.

“식사하셨어요?”하고 묻고,

심심한 어르신을 위해 작은 춤을 추고,

멀리 떨어진 가족에게 영상편지를 보내주는

밝고 따뜻한 디지털 도깨비다.

효는 이렇게 학생들의 손에서

과거의 미덕에서 미래의 서사로 다시 태어났다.

유튜브 디지털생활박사

4. 새로운 효도의 의미를 찾아서

그리고 나 역시 ‘디지털생활박사’라는 유튜브를 열었다.

혼자 계신 엄마가 시골에서 소외된 노년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고,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루고 있다.

나는 ‘디지털생활박사’ 유튜브에서 똘맹이라는 인공지능과 해님이라는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넣었다. 그러니까 할머니, 똘맹이, 해님이 이렇게 셋이 펼치는 디지털 세계이다.

노년층의 디지털 리터러시와 생활 건강 전반을 돕고 싶다는 의도이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에 효는 더 이상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 ‘해주는 것’만이 아니다.

부모님 자신이 기술과 친해지고

세상과 연결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도록 도와주는 과정 그 자체가

새로운 효가 될 수 있다.

나는 ‘디지털생활박사’ 영상을 만들면서 늘 생각한다.

“이 작은 도움이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 덜 외롭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효 아닐까?”

효의 미래는 ‘관심의 지속’이다.

옛사람은 살을 베어 부모를 살렸고,

김대성은 큰 바위를 깎아 시간을 넘어 효를 실천했다.

일연은 국사를 그만두고 노모를 근처에서 지켰다.

오늘 우리는

AI 효돌이를 만들고,

깨비송이로 마음을 위로하고,

디지털생활박사로 세대의 벽을 낮춘다.

결국 효란

시대가 달라져도

마음을 건네는 방식의 문제일 뿐,

그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논문이 세 번 떨어진 뒤에야

이 단순한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효는 과거의 미덕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상상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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