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이어지는 상상력
《메타버스 코스페이시스에서 직접 제작한 고래인사》
올 여름 한국해양박물관에서 고래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나는 강연에 온 대중들 앞에서 네 개의 이야기를 하나의 선으로 꿰었다.
연오랑·세오녀, 〈황주문생록〉의 고래와 채봉, 천명관의 『고래』, 그리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고래.
처음엔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강연을 이어갈수록 하나의 흐름이 드러났다.
그 중심에는 고래, 그리고 경계를 넘어 세계를 회복시키는 여성 영웅들이 있었다.
연오랑을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넌 세오녀,
폭포 아래 고래가 열어준 길로 용궁에 들어간 《황주문생록》 속 채봉,
침묵과 상처 속에서 고래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드라마 우영우,
거대한 삶의 폐허 속에서도 고래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는 천명관의 여성들.
나는 그날, 고래가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 여성 영웅을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신화적 매개자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 상징의 원형이 바로 세오녀와 채봉에게 있다는 것을 설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1. 세오녀 – 어둠을 밝히는 여성 영웅의 첫 얼굴
《포항 연오랑 세오녀 테마파크 강연 후 찍은 사진 》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에서 연오랑이 실종되자 세오녀는 망설임 없이 바다를 건넌다.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부부애나 희생의 서사가 아니다.
세오녀는 ‘일상 세계를 떠나는 부름(Call to Adventure)’을 먼저 받아들인 인물이다.
그녀의 이동은 곧 경계 통과(Crossing the Threshold)이며, 물리적 바다를 넘어 미지와 신성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상징적 행위이다.
세오녀가 일본에 도착한 뒤 남기는 것은 ‘빛을 되찾는 비단’이다.
해와 달이 사라져 어둠에 빠진 신라를 다시 밝힌 존재는 연오랑이 아니라 세오녀의 손길이다.
그녀는 귀환하지 않아도 세계의 질서를 회복시킨다.
즉, 세오녀는 사라진 빛을 되돌린 여성 구원자, 한국 신화 속 가장 오래된 형태의 생태적·우주적 균형 회복자라는 생각이 든다.
고래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바다를 건너는 바위의 움직임은 인간과 감정을 교류하는 고래적 상징과 매우 가깝다.
세오녀의 여정은, 뒤랑이 말한 ‘심연을 가르는 상징적 배’의 길과 닮아 있다.
2. 채봉 – 고래와 함께 초월로 나아간 여성 영웅
《메타버스 코스페이시스에서 제작한 세오녀와 고래들 》
1900년 초 작자미상의 소설 〈황주문생록〉에서 채봉은 이미 당대의 통상적 여성 서사를 넘어서는 인물이다.
그녀는 고통과 오해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끊고, 폭포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러나 죽음이 아닌 고래의 등장이 그녀를 맞는다.
고래는 채봉을 용궁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채봉은 자신의 전생을 깨닫고 무예·법술·지혜를 익힌다.
고래는 이때 시련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즉 캠벨이 말한 ‘고래의 뱃속(Belly of the Whale)’ 그 자체가 된다.
용궁에서의 수련을 마친 채봉은 고래의 등에 올라 전장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고래와 협력해 침략 세력을 물리친다.
이때 고래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다.
고래는 생명력과 모성, 자연적 힘을 상징하는 동맹자이며,
채봉의 영웅화를 완성시키는 초월적 생태 파트너다.
승리 후 황제가 고래에게까지 상을 내리는 장면은
채봉의 영웅성이 자연–여성–국가를 잇는 구조 위에 놓여 있음을 분명히 한다.
채봉의 영웅성은 폭력과 정복이 아닌,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현대적 생태윤리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3. 두 여성 영웅이 겹치는 자리, 그리고 학생들이 발견한 새로운 서사
세오녀와 채봉의 서사를 나란히 놓아 보면, 하나의 놀라운 공통 구조가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오녀는 바다라는 경계를 건너 일본에서 세계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채봉은 폭포를 통과해 용궁에서 새롭게 태어난 뒤 고래와 함께 전장을 지킨다.
두 이야기는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의 변신’, 그리고 자연과의 연대가 공동체의 회복을 이끈다는 신화적 패턴을 공유한다.
이 구조를 설명하자 학생들은 곧바로 자기 방식으로 두 영웅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세오녀가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3D로 구현하며, 바위가 움직이는 대신 거대한 고래 떼가 길을 열어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또 다른 팀은 AI 이미지 생성 모델을 활용해 채봉이 용궁에서 배움을 얻는 장면을 시각화하며, 그녀의 신체가 인간과 용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상징적 존재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이 학생 프로젝트들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세오녀와 채봉을 단순한 ‘옛날이야기 속 인물’로 두지 않고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다.
AI가 생성한 고래의 이미지들은 신화적 상징성을 강화했고, 메타버스 공간 속의 세오녀는 ‘빛을 회복하는 존재’라는 원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학생들이 신화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오녀와 채봉의 서사적 힘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화가 미래 세대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4. 현대에 다시 태어나는 세오녀와 채봉 ― AI 시대의 생태지킴이로
학생들의 프로젝트가 더욱 놀라웠던 지점은, 세오녀와 채봉을 단순히 과거의 영웅으로 재현하지 않고 오늘의 생태 위기 속에서 다시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한 팀은 AI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약 세오녀가 2025년에 깨어난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까?”라는 질문을 설정했다. 그들은 세오녀를 해양 오염으로 탁해진 바다에서 사라진 빛(생태 균형)을 되찾는 ‘해양 회복자’로 그렸다. 세오녀는 단지 연오랑을 따라간 여성이 아니라, 오늘의 바다에서 플라스틱 오염·해양 소음·고래의 좌초 문제를 해결하는 감응적 존재로 재탄생했다.
또 다른 팀은 채봉을 AI 기반 해양생태 분석가로 상정했다.
고래와 교감하는 능력을 가진 채봉은 위성 데이터와 AI 모델을 활용해 고래의 이동 경로와 스트레스 지수를 읽어내고, 인간 활동이 고래에게 미치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학생들은 채봉이 용궁에서 익힌 ‘지혜와 무예’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 “데이터와 생명을 잇는 능력”으로 바꾸어 냈다.
이처럼 AI와 메타버스를 활용한 학생 프로젝트들은
세오녀와 채봉이라는 고전적 여성 영웅 서사를 현대 생태 윤리와 기술 기반 문제 해결 능력으로 확장하는 창조적 실험이었다.
그들은 두 영웅을 통해 “구원은 자연으로부터 오고, 회복은 인간과 자연의 연대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재구성했다.
그 결과, 세오녀는 바다의 빛을 되찾는 여성 생태지킴이,
채봉은 고래와 인간을 연결하는 데이터 시대의 초월적 실천자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다.
신화가 가진 원형적 힘이 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기술은 오히려 고대 신화를 미래의 언어로 말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증명해 보인 것이다. 나는 학생들의 상상력에 고래라는 주제를 꺼내왔던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