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 취기가 오르는 알딸딸한 상태를 즐기지 않는다. 알코올이 몸속으로 퍼지면서 의식이 현실과 환각의 경계에 선 순간. 사람들은 그때가 가장 기분 좋은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그 경계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 마치 잠자리에 들어도 숙면을 취하지 못한, 허기지지만 당장 밥이 없어 주전부리로 배만 채우는 느낌이다.
알딸딸한 경계에서 술잔을 멈추면 현실로 돌아오지만 술잔을 비우면 완전히 환각 상태로 넘어간다. 나에게 술은 취하기 위함이므로 딱 좋은 만큼의 양은 부족하다.
나는 의식이 현실로 넘어가지 못하게 온몸이 알코올로 젖는 느낌을 좋아한다. 가끔 술에 취해 핑핑 도는 느낌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 몸이 가볍고 자유롭게 느껴져 황홀하다.
나의 남편은 술을 즐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즐길 만큼 딱 적당히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가급적 자신의 주량을 넘지 않으며 간혹 주량을 넘긴 날도 말과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다.
난 가끔 그런 그를 재미없는 사람이라 놀린다.
남편은 술 먹고 다른 인격이 되는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싫어하는 이성의 부류는 술 먹고 질척이는 여자이다. 연애시절 매일 술에 취해 질척이던 나를 바래다주던 남편이 이제 힘들다고 고백한 날 나는 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기에 결혼 후 힘든 육아에도 술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술과 멀리한 시간이 10년을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이 조금 크고 나니 남편과 함께 간단히 반주하는 일이 생긴다.
나는 원래 술을 섞어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직장 생활을 하며 소맥의 맛을 알게 됐다. 소주는 맑지만 목 넘길 때 날카로운 맛이 있다. 하지만 알코올맛이 강하고 어딘가 밋밋하다.
반면 맥주는 부드럽지만 텁텁하고 알코올 맛이 덜하다. 하지만 소주와 맥주를 섞으면 서로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된 음양의 기운을 머금은 술이 탄생한다.
소맥의 가장 큰 장점은 소주와 맥주의 양을 조절해 스스로 도수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 조화로운 술을 마시지 않을 이유는 없다.
육아를 하며 오랜만에 신랑과 반주를 하게 됐다. 오래간만에 느낀 소맥의 청량함. 못 젖을 때리며 온몸으로 퍼지는 청량감은 몸은 물론 마음의 피로마저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사람들은 즐거울 때나 슬플 때 술을 찾지.
모든 시작은 공평해야 하는 법이니 처음에는 소주와 맥주의 일정한 비율로 시작한다. 하지만 소맥은 몇 잔마셔도 배만 부르고 여간해서 취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맥주의 비율은 줄이고 소주의 비율을 높여 술의 도수를 높인다.
컵의 절반 이상 소주를 담고 맥주는 색과 냄새만 입힐 정도로 살짝 덮어준다. 투명하고 영롱한 소맥을 보니 흥분됐다. 이제 쭉 들이키고 현실을 넘어 만취의 극락으로 가려던 찰나.
하지만 10년 만에 가진 술자리에도 남편의 습관은 무너지지 않았다.
신랑은 집에서 반주를 하면 소주 반 병 정도만 마신다. 자신의 주량을 채운 신랑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술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정확히 내가 마시고 있는 술들만 빼고. 모든 음식을 정리하고 식탁을 나 보란 듯이 깔끔하게 닦았다.
'그만 마실 거야? 오랜만인데 나랑 한 잔 더 하자."라고 말했지만 눈도 안 마주치고 "아니."
"나 그만 마실까?"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아니, 마셔."
대답과 달리 신랑은 마치 진상 손님을 내쫓는 식당 사장님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이블을 말갛게 정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의 조금 오른 술이 확 깬 건 다음 순간이었다.
남편이 이불을 펴고 집안에 불을 끄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눕자마자 바로 숙면.
남은 술을 버리기엔 아까워 덩그러니 남은 마지막 잔을 비우고 나도 일어섰다.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아내의 기분을 맞혀줄 만한데 신랑에겐 무심함을 넘어 냉담함이 느껴졌다. 사실 남편은 술 때문에 상처받은 유년의 기억이 있다. 술 취한 엄마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난 극락은 못 갔지만 그래도 그가 야속하기보다 고맙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나의 술버릇에 늘 제어장치가 되어줘서.
결혼하기 전 술을 마시면 부끄러움과 숙취를 혼자 감당하면 됐다. 하지만 결혼하니 내가 만취가 되면 누군가 나를 받아주고 견뎌줘야 하는 일이 생길 것 같아 미안하다. 그게 바로 나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것 같아 그들이 받을 상처가 두렵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 두려움도 커지는 법이다.
나는 그래도 여전히 술에 대한 나의 신념은 확고하다. 안 마셨으면 안 마셨지 적당히가 싫다. 알딸딸한 딱 기분 좋은 상태보다 얼른 만취로 들어서고 싶다. 그래서 술 즐길 재미가 나지 않을 것 같다.
술잔을 넘길 때마다 남편과 아이들 생각이 나 나에게 만취는 이제 예전 추억이 될 것 같다.
가끔은 아쉽겠지만 이 또한 결혼과 출산이 나에게 주는 이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