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간에는 '외모정병'이라는 말이 떠돈다. 이는 '외모에 대한 정신병'을 의미하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의 외모의 어딘가, 혹은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외모정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중안부 정병(얼굴 중 중안부가 길다고 느껴 집착하는 것)', '광대 정병(광대뼈가 너무 크다고 느껴 집착하는 것)', '쌍커풀 정병(쌍커풀에 대해 집착하는 것)' 등 외모의 특정 부위와 '~정병'이라는 접미사를 붙이면 대강 무슨 느낌으로 말하는지 표현이 된다.
외모정병은 새로 생긴 관념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외모의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는 얘기하기 힘들 것이고, 그것이 '정신병'이라고 (반 쯤은 장난으로) 일컬어질 만큼 정도가 심화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상태에서 아름답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통상적으로 '예쁘다', '잘생겼다' 하는 외모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외모에 집착하게 될까? 간단하다. 면접, 소개팅 같은 자리부터 일상에서 형성하는 인간 관계까지, 모든 것은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다. 첫인상을 바꾸는 데에는 3~6개월이 걸린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완전히 사실이라고는 얘기할 수는 없지만,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이 격언처럼 나돎으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외적인 요소는 절대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첫인상에서 깔끔한 옷차림, 청결한 위생 상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외모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외모가 앞선 조건들과 다른 점은,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점이다. 타고난 눈 크기, 코 높이, 턱 모양, 얼굴 크기, 쌍커풀의 유무, 중안부의 길이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모정병이 이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리 만지작대고 주물럭 대도 신체 부위를 마음에 들도록 변형하기란 힘들다. 한 번 눈밖에 난 그것은 심하면 자해의 형태로까지 나타난다. 이렇게 병적이라고 표현할 수준의 외모에 대한 집착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외모지상주의(Lookism), '타고남'에 대한 선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돌은 그 극단적인 예시이다. 이들을 고찰해보자. 외모를 뽐내며 노래 부르고 춤추는 아이돌(Idol)은 문자 그대로 외적인 아름다음을 숭배하는 이들의 우상이다. 이들의 인성이나 사생활은 이들의 외모에 따른 명성에 부가적인 요소일 뿐, 아이돌을 소비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기업들은 그 추종자들로부터 아이돌로 하여금 영화, 드라마, 광고, 예능 프로그램,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곳곳의 매체에 출연시켜 상품을 판매하거나 때로는 아이돌 그 자체를 상품화하여 판매한다. 아이돌에게 결점이란 때로는 하나의 매력으로 승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감히 비약을 조금 보태자면, 현대 사회에서 매력적인 외모란 곧 모든 것을 약속하는 일종의 보장이다.
이러한 인식은 미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면서, '무엇이든 평균선이 상향평준화 되는 현대 사회 특유의' 붉은 여왕 효과를 통해서 '여길 고치면 더 뛰어나질 수 있어' 가 아니라 '여길 고쳐야 뒤처지지 않을 수 있어'라는 강박 관념으로 자리잡고야 말게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외모정병'은 외모에 대한 탐미주의라기 보다는, 현대 사회가 병들었다는 발로인가보다.
나는 병적인 외모의 집착을 느끼는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슬퍼하고 비탄하며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살다보면,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겹쳐가며 아름다움의 범위는 점차 넓어진다. 아름다움은 형태에 국한되지 않고 또 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는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다. 하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라파엘로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의 시각적 이미지를 조화롭고 아름답게 표현했던, 르네상스를 풍미한 천재 미술가이다. 피카소는 그런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다고 한다. 향년 91세의 나이에 4년이란, 아이처럼 그리는 데 걸린 평생에 비교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다. <첫 성찬식>과 비교했을 때, <우는 여인>은 일견 낙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첫 성찬식>과 같은 형태로 '정형화된 아름다움'만을 갈고 닦은 미술가가 <우는 여인>과 같은 형태로 다양한 그림과 상황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아이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란, 흉내는 가능해도 절대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천재 미술가인 피카소조차 평생을 바쳐서 비로소 다다를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이러한 순수함과 동시에 앞과 옆을 모두 표현해내는 복합적인 형태의 미술을 회화로써 표현하는 피카소의 천재성에 대한 찬미는 재쳐두자. 중요한 것은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일평생 고민했던 피카소는 흔히 생각하는 일차원적인 아름다움만을 예술로 표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 남들이 함부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처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사람은 평생에 걸쳐서 자기 나름의 기준을 세워간다.
미의 추구란 본능이고, 본능은 생존의 도구이다. 존재의 목적이란 생존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모른다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탐미라는 본능은 생존에 필요하다. 지표가 되는 본능 중 하나인 탐미(欲美)로써,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살아가다보면 아름다움은 확장된다. 아름답다는 기준의 확장은 어느 한순간에 이뤄질수도, 조금씩 넓어질 수도 있다. 가령 외모에 대한 이끌림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만개한 웃음에서 오후의 햇살로, 햇빛으로부터 반사되는 초록의 나뭇잎으로... 그렇게 차츰 넓어지는 아름다움은 평범한 일상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아름다움에는 구질구질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헐뜯고 욕하고 짜증내고 궁색맞게 살아가면서도 결국엔 부대끼며 사는 것. 가족이 그렇지 않은가? 구질구질한 사랑은 인간의 도착지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비록 만족스럽지 않은 외모라도 사랑하고야 말게 될 것이다.
사랑하고자 하면 어떤 것이든 사랑하고야 마는 것은 또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