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용서를 위한 서장序章이다.
요즈음 나는, '기회만 주어지면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 기회 잡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려고 몇 자만 적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닌거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상은 나에게 언제든지 몇 번씩이나 기회를 주었다. 물론, 그래, 지나고 보니 그게 기회였음을 깨달았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단 한 번이라도 붙잡지 못했음에 자책이라도 하고 싶어서일까, 그때의 내게 왜 기회를 붙잡지 못했느냐고 책임을 돌리고 싶어서일까.
나는 지금까지의 수없이 많은 스스로에 대한 용서로써 알고 있다. 그 어떤 때던 그 순간의 내 선택이, 당시의 내게 있어서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성숙함을 마음의 지표로 삼고 있다면, 그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미숙한 사람을 질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꼈기에, 그때의 나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는 사람임에 틀림은 없다. 비록 지금조차 아무것도 되지 못한, 적어도 ‘내가 바라던 나’가 되지 못해 떳떳하지는 않음에도, 그때보다는 내가 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의기소침하고 치기조차 어리지 못했던 그때의 내게, 무어라고 꾸짖을 만큼 냉혈한도 못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나의 팔자에 대해서 한탄하는 것보다는, 그 전에 몇 가지 ‘나’의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
첫 번째로,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여기에 단편적인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해주기를 좋아했다. 먹을게 있으면 그냥 나누어 준다던지 하는 간단한 베풂은 말할 필요도 없고, 새학기에 교과서를 날라야 하는 일이 있으면 먼저 간다던가, 아침마다 교무실에 들려 출석부를 가져온다던지, 매 쉬는 시간마다 칠판을 지운다던지 하는 행동들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때에도 어렴풋이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하는 일이 나쁜 건 아니잖아'하며 '인정 받고 싶은 나'를 얼버무리고, 부정하려 들었다. 그게 나쁜 게 전혀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부정하고,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행동들을 다른 사람이 늘 알아채어 주는 것은 아니다. 거짓으로 나조차 내 본의를 왜곡했음은 차치하고, 다른 사람이 내 선행을 알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숙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어차피 나는 좋아서 한 행동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는 ‘보상’ 따위 바라지 않았어’라며, 내 행동 그 자체에 의미를 둔 양 하며 어줍잖게 실수를 인정하기를 피해버렸다. 내가 이때라도 교훈을 얻고자 했다면, 그 뒤에 있을 기회라도 잡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이다. 나는 도전적이지 못하다. 다른 말로는 실패를 두려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대학생이 되면 막연하게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이방인이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늘 두려우면서도 설레이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내가 교환학생을 가서 뭘 할수있을까?', '그냥 돈이랑 시간만 허비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가서 내가 어떤걸 이루고, 어떤 일을 해낼 것인지 야망에 가득차 있기보다는, '무작정 가려고 하는 나 자신'을 구태여 발견하고, 실패가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내 태도는 늘 적극적이기 보단 수동적이었다. 목전에 목표가 있다면 이루려고 하지만,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달성해야만 할 때에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이다.
물론 지금은 알고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정말 바란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보다 '해야만 하는 이유'를 더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망설임의 대가로 치르는 담담한 씁쓸함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내게 계속해서 좋지 않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세 번째로는, 가장 병든 사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나의 객체화’이다.
소위 메타인지라고 일컫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개념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내 인생에 대해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일 때에는 ‘되면 좋고, 아님 말고.’가 아니라, ‘그냥 망해도 돼.’라고 하는데, 반대로 그냥 넘겨도 될 사안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어찌 돼도 좋을 사안을 계속해서 곱씹는 안좋은 버릇이 있다.
이 태도를 왜 ‘객체화’한다고 개념 짓느냐 하면,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나를 위해서라면 가장 취하면 안 될 태도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엎어지고, 심지어 지금도 무너져 내리며 망해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말해도 내 인생이고, 내가 책임져야만 하는 인생이다. 다 엎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시간들을 누가 와서 돌려주지도 않고, 오롯이 책임을 진 것은 어디까지나 나이기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내가 내 인생을 객체화시켜버린다고? 맙소사.
그래서 이런 병폐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질렀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크던 작던 결국 ‘상처를 덜 받기 위해서’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였고, 부끄럽게도 감정에 휘몰리는 타인을 힐난하고 깎아내려 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일생에 걸쳐서 지킨 '무언가'로 뭘 이루었는지 보자면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 바로 그 자체이다. 업신여기는 양 외면하고, 합리적인 선택인 양 도망친 결과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정말 객체이자 타인이라면, 종생終生에 이르기까지 내가 업고 가야 할 타인의 죄가 바로 이것이다.
과거의 실수들을 직면하지 않으면, 교훈을 얻지 못하고, 비슷한 실수만 되풀이 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자책하고, 다시 이렇게 한탄하며 넋두리만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던가, 기회가 없음을 탓하기 전에, 내가 한 실수부터 되돌아보고 인정하며 그것으로부터 나아가야 한다.
내가 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쓴 이 서장이,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미래의 나를 지탱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