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찜질방에 가자고 돌발 제안을 했다.
아빠 : 그래 갈까?
아이들 : 가요, 가요.
나 : 엄마는 못간다.(찜질방 싫어함.)
아빠 : 엄마 못 가면 나도 못 간다.
딸이 화를 낸다. 계속 낸다. 더 낸다.
나 : 동성애의 폐해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키자는데? 심지어 집회를 한대?(길가에 걸린 현수막을 읽음)
딸 : 말돌리기 선수라니깐요.
막내 : 페넬로페처럼 시간 끄는 거예요?
나 : 오오~~
막내는 일주일 전 <오뒤세우스의 방랑과 모험>을 다 읽었다. 막내의 말 뒤에 막내와 내가 눈을 맞추며 웃는다. 오뒤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는 데 10년,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 사이 구혼자들은 오뒤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며 오뒤세우스의 재산을 탕진하고 그 아들 텔레마코스를 위협한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대접하며 오뒤세우스를 기다린다. 시간을 끌며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돌아온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세월이 흐르도록. 막내는 이 책을 막 다 읽은 참이라, 찜질방 권유를 물리치려는 엄마에게서 시간 끌기의 대명사 페넬로페를 떠올려주었다.
막내가 오늘 말한다.
막내 : 어릴 때 고전을 읽으면 뭔가 특별한 거죠? 전 그런 의미에서 <80일 간의 세계 일주>를 읽겠어요."
나 : 엄마 추천은 <왕자와 거지>야.
막내 : 축약본으로만 읽었으니까 완역본으로 읽어볼게요.
모처럼 아주 즐겁게 책을 읽는 아들. 왕자와 거지는 진리다. 오늘 읽은 분량에 대해서는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고 육하원칙에 따라 대화한 다음 쓴다.
그리고 나는 페넬로페님께 쓴다.
페넬로페님 제 아들의 비교가 틀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기다림의 대명사. 저도 만만치 않아요. 저는 막내에게 <왕자와 거지를>를 읽히기 위해 11년을 기다렸거든요. 물론 당신 남편의 이야기도 읽히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둘째는 요즘 저와 당신 남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막내에게도 곧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완역본 말입니다. 날이 선선해요. 오뒤세우스가 돌아와 복수하기 좋은 계절이군요. 당신이 보낸 긴 세월을 보상받기에도 더없이 좋은 날이고요. 저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로 매끄러워서 살짝 불안합니다. 내일을 위한 배신의 씨앗이 어디서 싹트고 있을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