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과 폭풍같은 빵사랑

by 쓰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두 번째 날인 다음 날에는 이제 린턴을 찾아가지 않겠다고 거의 결심할 뻔했지.

하지만 린턴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고 깨어나는 일이 너무 비참한 나머지 내 결심은 제대로 굳기도 전에 녹아 공중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한때는 그곳에 가는 게 잘못으로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곳에 가길 꺼리는 게 잘못으로 느껴지지 뭐야. " -<폭풍의 언덕> 중에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사랑했다. 하지만 캐서린은 린턴과 결혼했고, 히스클리프는 상처받고 떠났다. 3년 뒤 폭풍의 언덕으로 히스클리프가 돌아온다. 캐서린은 린턴과의 사이에서 캐서린 린턴을 낳았고 캐서린의 시누이 이사벨라 린턴은 히스클리프와의 사이에서 린턴 히스클리프를 낳는다. 두 아이는 사랑에 빠질 참인데 캐서린의 딸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몰래 히스클리프의 아들을 만나러 가게 된다. 캐시는 히스클리프가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히스클리프의 아들을 만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결심은 매번 실패한다. 저 문장은 그런 캐시의 심정을 잘 나타내줌과 동시에 내가 근래 빵을 대했던 태도와 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격렬한 사랑이야기에 빵이야기라니?


물론 폭풍의 언덕은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강렬하다. 진심 모르는 거 아니다. 내 자식들만큼이나 순수한 악당의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낯설지 않다는 점에서 한편 새롭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에서 나는 아무리해도 남녀간의 사랑 자체를 탐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이야기는 차라리 나의 빵이야기와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빵을 먹지 않기 위해 수많은 결심의 순간을 맞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풍의 언덕의 캐시가 린턴에게 가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과 닮아도 너무 닮아서 그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나는 오래도록 식탐이 없었고 미식에 대한 감각도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다. 맛있는 게 없었다기보다 먹는 건 기본적으로 끼니를 때우는 데 더 의미를 두었다는 편이 맞겠다. 다만 비린내와 식감에는 예민했다. 좋아하는 걸 안 먹는 건 괜찮지만 싫어하는 걸 먹는 건 절대로 참지 않았다. 그런데 빵은 달랐다. 나는 어느 제과점의 빵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소화가 잘되고 먹어도먹어도 질리지 않는 담백함, 때로 상쾌한 달콤함이 있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빵이 있었다. 삐몽(우리 동네 빵집 이름)빵과 다른 모든 빵들이다. 삐몽빵을 다시 두 가지 갈래로 나누면 갓 구운 빵과 어제 구운 빵이 있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두 갈래는 갓 구운 빵과 어제의 빵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와서 이 갈래는 삐몽빵 하위 범주로 들어가게 된다.


삐몽빵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1살 때였다. 가깝고 대로변이고 많은 좌석이 있고 큰 빵집이었다. 빵을 직접 구웠고 다양한 빵이 있었다. 천연발효종으로 이틀간 숙상한 밀가루 반죽을 사용하고 재료들을 좋은 재료들을 썼다. 첫아이니까 아무래도 프랜차이즈 빵보다는 이편이 끌렸다.


그때만 해도 여기 빵을 최고로 여기진 않았다. 빵을 자주 먹다보니 다른 곳의 빵들에서 나는 특유의 밀가루 풋내가 싫어서 이집 빵을 먹었고 건강에 더 나을 것 같아 들렀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이 집 단골이 되어서 한 여름 팥빙수를 서비스를 받기까지는 코로나가 있었다.


코로나가 터지자 남편은 재택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하루 한 번 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막 가게 규모를 줄이고 전 주인으로부터 독립한 삐몽 빵집에 줄기차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마침 새로 나온 깜파뉴의 부드럽고 쫄깃한 맛에 반해서 매일매일 먹었다.


남편은 노는 남자인가 의심받을까봐 이틀에 한 번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했지만 나는 다른 곳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삐몽의 커피는 순했고 빵도 그랬다. 하지만 단맛을 강조한 디저트가 발달한 카페들의 커피는 단맛이 들어가야만 삼킬 수 있는 진하고 쓴 커피를 내놓았다.


그런데 단골이 되기까지는 짧고, 단골을 유지하는 건 어려웠다. 잠봉뵈르에 빠져서 JR 베이커리 카페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제 세상의 빵은 조금 다른 두 종류로 나뉘었다. 삐몽 빵과 JR 빵. 정말 가지 않으려면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2주 정도를 매일 가서 커피와 잠봉뵈르를 먹었다. 이제는 주인이 우리의 취향을 알아주고, 대체로 테이크아웃 위주의 카페에서 머그컵에 커피를 담아 주었다. 남편은 이 점에 감동을 받았다. 취향을 알아준다는 것,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서비스를 알아준다는 건 꽤 멋진 일인 것도 같다. 하지만 이렇게 먹어대니 살이 오르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였다. 늘상 아프던 잇몸에도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점심 때가 되어 카페로 가는 동안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 다음주부터는 이 집에 안 가기로 단단히 결심했어.

남편 : 정말? 실패하면?

나 : 그 다음엔 굳은 결심을 해야지.

남편 : 그래도 실패하면?

나 : 독한 결심을 해야지.

남편 : 그래도 실패하면?

나 : 죽을 각오를 해야지.


결심의 최종 4단계 중 나는 단단한 결심부터 단행했다. 단단한 결심은 굉장히 빠르게 결정되지만 하루도 가지 못하고 무너졌다. 실패한 김에 단단한 즐거움을 쌓기로 했다.


"만약, 우리가 매일 하나를 나눠먹는다면 우리는 여길 끊지 못할 거야. 항상 미련이 남거든. 매일 점심 시간이 되면 나눠야 할 분량에 대한 걱정이 밀려올 거야. 내가 결심을 끊는 데는 아무래도 온전한 하나가 필요할 것 같아"


남편은 설득이 된 건지 자신도 하나씩 먹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하나씩, 시켜먹기로 했다. 확실히 조금 더 결심을 실행하기 좋은 상태에 이른 것 같기는 했지만, 굳어진 건 의외로 운동할 결심이었다. 종종 빼먹던 운동을 빠지지 않고 가야겠다고, 매일 아침 기를 쓰고 운동을 가고 잠봉뵈르를 먹었다.


이제 굳은 결심의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굳은 결심의 핵심은 단절보다는 당근과 채찍이다. 매일 가벼운 등산을 1시간 마친 뒤에야 잠봉뵈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숨 가쁘게 산을 올랐다가 베어커리 카페까지 가는 데는 약 2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이 운동을 매일 할 수는 없었다는 것. 산에 올라가면 어쩐지 기침이 나고, 미세먼지도 많고, 일상이 지나치게 바빠지는 느낌이랄까. 굳은 결심은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계획에서만 가능한 것. 이 결심 단계의 계은 무리한 계획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다음 단계 독한 결심으로 넘어가게 된다.


안타깝게도 독한 결심도 죽을 각오도 잠봉뵈르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죽을 각오는 무슨, 아이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고 종종 사다줬다. 이전의 단골집인 삐몽 빵을 사랑하는 셋째에게 새로운 JR 빵집의 빵을 먹이며 물었다.

나 : 어때, 맛있어?

셋째 : 다음엔 무조건 이걸로 사주세요.


JR 베이커리는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눈에 띄는 고객이 되었다. 문을 열고 인도로 나왔는데 남자 사장님과 마추져 인사를 나누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나는 걱정이 앞선다. 이 집도 언젠가는 발길을 끓거나 옮기게 될 텐데 주인과 고객 사이가 너무 멀리 온 것 아닌가. 이제는 가면 서비스 빵도 준다. "하드빵을 좋아하시길래 출시 예정인 빵좀 드려요" 아흑. 취향을 짐작해준다는 건 왜 이렇게 감동적인 걸까. 나의 식감 취향 이렇게 대접받다니.


4단계의 그럴듯한 결심의 각 단계들은 1주일도 지속되지 못했다. 잠보뵈르가 없으면 바게뜨만 사서 잠봉뵈르를 만들어 먹었다. 이 편도 꽤 괜찮다. 그런데 식생활이 무너져서 그런가 평소 아프던 잇몸이 아파왔다. 잇몸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데다 이런 식생활이 잇몸에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엄청난 자괴감이 밀려왔다.


채식을 시작했다. 이번에야 말로 죽을 각오로 채식도 하고 빵과 커피를 끊어야지. 하지만 나는 또 실패하고야 말았다. 점심 때가 되자마자 커피와 빵을 먹으로 달려간다. 맛은 있었지만 상심이 컸다.

나 : 어떡하지? 밀가루 먹으면 안 되는데.

남편 : 무슨 소리. 이건 밀가루가 아니라 밀가리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 말한다 "여기는 끊을 수 없을 것 같아."

............

나의 상심은 쾌활했다.

나의 상심은 웃었다.

에밀리 브론테와 함께 그 빵집을 다녔더라면 그녀가 이렇게 말해줬을 것이다.

"한때는 그곳에 가는 게 잘못으로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곳에 가길 꺼리는 게 잘못으로 느껴지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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