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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Mar 02. 2023

새생명의 늪에서 자유 찾기

<프랑켄슈타인>


"바로 봤어. 요즘에 한 가지 문제에 너무 심하게 몰두해서, 보다시피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거든. 하지만 이제 모든 일들이 끝나서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네."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없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고자 2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어느날 예고 없이 존재가 숨을 쉬자 “정성들 들여 빚어낸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괴물”로 규정하고 방을 뛰쳐나가고, 거리에서 오랜 우정을 나눈 고향 친구 클레르발을 만난다. 그를 만나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프랑켄슈타인이 클레르발에게 한 말은 “모든 일들이 끝나서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었다. 생명을 그것도 평범하지 않은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남자가 하는 말이 ‘자유’에 대한 것이라니.



21살 때의 일이다. 함께 분식을 먹던 언니가 말했다 “남기지 말고 먹어” “언니, 이거 남기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못하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이런 궤변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상대의 입을 잘 막거나 웃게 했다. 나태하고 헐렁한 나는 자유를 무언가 하지 않아도 좋은 상태로 인식했고 그걸로 만족했다. 싫은 건 하지 않아도 좋았던 나이였고, 집안의 넷째가 꼭 해야 할 일은 딱히 없기도 했다.



호기심이 많아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반대로 하기 싫은 것도 많았다. 아이를 낳고 이 상황은 극대화되었다. 아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몇 배는 늘었다. ‘며느리’가 되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고 생전 처음 아이를 낳아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시가’는 알 수 없는 세계였다. 결혼을 하는 순간 내 뇌속에 ‘며느리 기능’을 다운로드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찌 갑자기 누구집의 며느리가 되어서 원하는 기능들을 수행하겠는가. 이 이야기는 지루하니 건너뛰자. 며느리와 엄마, 아줌마, 주부의 역할에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굉장히 많았다. 이는 대체로 꼭 해야 만 하는 일이어서 더욱 괴로웠다. 하고 싶은 걸 하고 하기 싫은 걸 하지 않는 상태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자유라면, 나는 부자유했고, 고통받았다. 아이를 2년 터울로 셋을 낳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부자유했다. 오래된 빌라 3층에서 아이 셋을 키우게 되었으니 나에겐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제때 식사할 자유도 자야 할 때 잘 자유도 제한된 건 말할 것도 없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메데이아>에는 유자식 하팔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어떻게 해야 자식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 다음은 어떻게 해야 자식들에게 생계 수단을 물려줄수 있을까 하고. 게다가 이렇게 애써도 자식들이 나쁜 사람이 될지 착한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해요. 마지막으로 또한 가지. 모든 인간들에게 닥치는 가혹한 고통을 말하겠어요. 그들이 재산을 넉넉하게 모으고,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유능한 인물이 된다 하더라도 신께서 그러기를 원하시면, 죽음이 자식들을 저승으로 채어가 버리지요.” 자식을 낳는 순간, 나에게서 비롯된 존재에 대해서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에만 연연할 수는 없다.




첫째가 8살, 둘째가 6살, 셋째가 4살, 셋째가 막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해 적응했을 무렵, 둘째와 큰애를 축구 교실에 데려다주고 운전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길은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도 없고, 엑셀을 밟을 필요도 없는 야트막한 길이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자유’를 느꼈다. 해방감과는 달랐다. 해방감은 벗어났다는 느낌이지만 이때 느낀 자유는 완성된 느낌이었다. 왜 나는 완성된 순간을 자유라고 느꼈을까? 나는 그 날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더 이상은 할 일이 없었던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대상도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자유가 찾아왔다.




나는 일을 미루는 스타일이었으므로, 아이를 낳고 늘 산더미처럼 쌓인 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다. 그날 처음으로 그 방법을 깨달았던 듯싶다.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떼어놓고 아이도 제 할 일을 하며 그 시간을 서로 충만하게 보낸다면, 그 순간에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으므로 자유가 잠깐 찾아온다. 이날부터 나에게 '자유'의 결이 달라졌다. 아이들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못 먹을 때느끼는 부자유도, 그걸 먹었을 때의 자유를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아침을 먹이고 즐겁게 헤어지고 기쁘게 맞이해서 낮동안 햇빛 아래 원하는 방식으로 놀게 한다. 해가 지면 아이들이 씻고 집안에서 노는 동안 카레를 한 솥 끓여 포근포근한 감자맛을 즐긴다. 아이에게 할당된 하루치의 문제집을 풀리게 하고 채점을 해서 틀린 문제까지 풀게 한 다음 독서를 하고 아빠가 오면 격하게 환영하고 잠깐 논 다음 함께 잠이 든다. 뒷베란다의 쌓였던 빨래는 옷장으로 들어가고, 부엌엔 설겆이가 되어 있고 내일의 카레까지 준비되어 있다. 이때라면 더는 원하는 것이 없어 잠깐 자유하다.



아이들 어릴 적엔 또래를 키우는 이웃들과 조금 더 밀접한 관계 속에서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집 밤 숟가락은 몰라도 그집이 어디 좋은 곳을 놀러갔는지, 어디 좋은 학원에 보내는지 알게 된다. 때로 밤이 쓰린 이유가 하찮은 결핍에서 찾아오므로, 오늘은 아이들과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던 날들은 동시에 그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유를 갈망했다. 나는 그날그날 아이들과 웃음을 나누며 보내는 것으로 자유를 찾았다. 가고 싶은 곳, 아이들을 위해 꼭 남들처럼 해야 만 하는 일이 사라졌고, 자유가 찾아왔다. 만족스러웠다.



자, 프랑켄슈타인 당신의 자유 프로세스는 이렇다. "생명"이 깨어난다. 생각보다 비호감이지만 "까꿍"하고 웃어준다. 누런 살갖은 씻어주고, 다 드러난 근육과 혈관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힌다. 구하기 힘들다면 이불을 씌워준다. 화려한 흑발은 빗어서 넘겨주고, 이빨은 진주처럼 희더라도 한 번 닦아준다. 허여멀건 눈구멍과 희번덕거리는 눈도 세수할 때 잘 씻어준다. 나중에 안경을 씌워주면 더 좋을 것이다. 쭈글쭈글한 살갖은 동백기름 정도를 살짝 발라주면 어떨까 싶다. 따뜻한 수프를 끓여 먹이고 동요 한 곡을 함께 부른다음 한 숨 재우는 편이 좋다. 재워보면 안다. 얼마나 순진하고 아름다운 얼굴인지. 애들은 눈만 감으면 천사다. 그러고 나면 잠든 얼굴을 뒤로 하고 아주 잠깐 자유를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그 존재”로부터 자유를 갈망한다. 회피하면 가능할 것처럼 자유를 언급하는 프랑켄슈타인의 발상은 얼마나 천진한가. 나로부터 비롯된 존재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는 일은 매일매일 그 존재를 위해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한 다음에 잠깐씩 찾아올 뿐이고, 이 짧음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을 목표로 오늘 하루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들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 최선일 테다. 생명을 만들어놓기만 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고, 생명을 키우면서 반드시 부딪히게 되는 한계들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일이다. 새생명의 늪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아이와 나의 시간을 충만하게 만들어가는 만큼 자유가 비례한다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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