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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Sep 10. 2023

K개츠비와 A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시댁에서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과일을 내오시며 말씀하셨다. “야 집안일 시키지 마래이. 출세 못한다.” “출세란 무엇인가?" 여쭤야 할까 '출세 요구는 유료"라고 주장해야 할까.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그런 게 어딨노. 같이 해야지.” 출세를? 아니 집안일을. 출세든 집안일이든 같이 하면 좋다. 남편은 어머니 말의 반은 들어줬고 반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나는 직장에서 이런 멘트를 남기고 사라지곤 했다. “남편 출세 때문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대한민국 '출세'의 요람이었으나 기능을 상실한 고시촌에 산다. 로스쿨 도입과 사시 폐지로 '출세의 요람'은 사라지고 없지만 출세를 잊은 우리는 사법고시생이 없는 고시촌을 살아간다.


쇠락해가는 고시촌의 미장원 원장님은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때, 나보고 다들 그러더라고.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디?" 그녀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지고 머리를 만지러 올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다.  상경을 결심한다. 종로 묵은 부자들의 머리를 만지고 그들의 총애를 받다가 강남에서 개업, 이어지는 폐업, 그리고 산골짜기 관악으로 들어오기까지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강남 신흥부자들이 모여드는 봉은사로 가서 합창하고 기도를 올리며 성공을 비는 이즈음에 이른다. 우아하게 머리를 올리고 있는 원장님 옆에는 유명 배우의 장모님이 서서 노래하고 있다. "기도하고 공들여. 그래야 해. 그래야 성공해."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지만 여기에 있는 K 개츠비들에겐 넘사벽 출세가가 있다. 불세출의 출세가 "위대한 개츠비" 그의 이야기는 어떨까? 그는 중서부의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랬던 그가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엄청난 부자가 되어, 동부의 묵은 부자들이 사는 맨해튼을 향해 돌진하는 롱아일랜드의  웨스트에그에 살고 있다. 롱아일랜드의 해변에는 계란 모양으로 동그랗게 솟은 두 지역,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가 있다. 개츠비가 웨스트에그의 대저택에 사는 건 그의 첫사랑 데이지가 웨스트에그보다 부촌인 이스트에그의 만에 자리잡은 대저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부의 묵은 부자이자 망나니 톰 뷰캐넌과.


개츠비는 5년 전 만났던 첫사랑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성공을 향해 매진했다. 오직 데이지에 대한 환상으로만 버텨온 세월이었다. 웨스트에그의 대저택에서 매주 화려한 파티를 열고 있는 중이고, 옆집 코딱지만한 작은 집에 사는 데이지의 사촌 닉에게 부탁해 데이지를 만나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곧 그녀를 다시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빠진 개츠비. 그는 확실히 출세했다. 개츠비의 대저택에 온 데이지가 개츠비의 아름다운 실크 셔츠들에 눈물 흘리도록 했으니 말이다.


10대 후반 무렵 여전히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개츠비는 어떻게 젊은 나이에 벼락부자가 되어 출세했을까? 집을 떠나 대학을 2주만에 그만두고 슈피리어 호수에서 할일을 찾던 10대 후반 시절,  개츠비는 슈피리어 호숫가에 닻을 내린 댄 코디를 만났다. 개츠비의 민첩함과 유별난 야망을 알아본 댄 코디가 그를 데리고 항해를 시작했다.  댄 코디와 5년 동안 항해하면서 수행비서로서 항해부터 모든 잡다한 일을 처리했다. 군대에선 참전 영웅이었고, 이 헤택으로 옥스포드에서 잠깐 배움의 기회를 갖는다. 제대한 뒤에는 캐러웨이를 만나 그를 도우면서 불법적인 돈을 벌어들인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는 호기심은 당기지만 어딘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없다.


개츠비가 죽고 개츠비 장례식에서 만난 개츠비의 아버지는 개츠비의 어릴 적 책을 보여주며 그 안의 메모들을 닉에게 보여준다.


기상................................오전 6: 00

아령 들기와 벽 타기...........오전 6:15~6:30

전기학 및 기타 공부 ..........오전 7:15~8:15

일...................................오후 8:30~4:30

야구와 스포츠 ..................오후 4:30~5:00

웅변 연습, 자세 습득 훈련....오후 5:00~6:00

발명에 필요한 공부 ............오후 7:00~9:00


결심

섀프터스나 또는 XXX(해독 불가능함)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

궐련과 씹는 담배를 삼갈 것

이틀에 한 번씩 목욕할 것

매주 유익한 책이나 잡지를 한 권씩 읽을 것

매주 5달러 3달러씩 저축할 것

부모님 말씀 잘 들을 것


"나는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소. 이 정도면 지미(개츠미의 이름)가 어떤 녀석인지 짐작할 수 있을 테지?"에 이어 "지미는 반드시 출세할 애였소, 그 애는 언제나 이런저런 결심을 했거든. 그 애가 자기 계발을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오? 말도 못하게 열심이었지. 언젠가 한 번은 이 애비더러 음식을 돼지처럼 처먹는다고 하기에 그 애를 떼려 준 적이 있소."라고 말한다.


관찰자 닉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개츠비의 모호함도 성공 스토리의 진부함도 이 메모에서 해소되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서사를 가진 인물로 아로 새겨진다. 진흙 속에 묻혀있던 이야기가 단단한 부조가 되어 튀어 올랐다. 그는 자기 계급에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욕망했다. 건강한 신체와 교양을 쌓으려는 욕망. 가난하고 고단했을 일상 속에서 자신을 고양시키고자 한 개츠비를 알고 나니 자칫 졸부로 보일 그에게 애틋함이 생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하기를 보자니 목이 멘다. 데이지를 향한 환상, 자신을 가꿔나가고자 했던 이런 열망, 미래에 대한 강력한 희망들이 출세의 바탕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의 출세는 그토록 원하던 데이지에게 이르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계급에 이르지 못했다. 데이지가 운전하던 차에 동승했던 개츠비. 데이지는 우연히 남편 톰의 정부를 차로 치여 죽이게 되고, 이 일로 톰이 데이지를 괴롭힐까 걱정하던 개츠비는 둘의 작당으로 정부의 남편에게 살인자로 오해받아 살해당한다. 데이지는 남편 톰과 함께 개츠비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떠나버렸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걱정한 채로 쓸쓸히 죽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이해하기 위해 알았어야 할 상류 계급의 특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데이지가 자기 이익을 위해 개츠비를 외면할 거라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못했다. 깨달았더라도 그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거대한 환상을 놓지 못했을 터이고 말이다.


개츠비는 배고픔이 해결되면 그 너머는 관념으로 꽉 채워진 이상적인 세계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데이지가 돈과 사랑을 모두 고려한 선택을 했다는 것, 자신의 토양을 이어갈 집안의 남자를 선택했다는 것, 데이지가 발 딛고 서 있는 대대손손 물려줄 유용한 이해관계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계급이란 나고 자란 곳의 토양이다. 상류 계급은 단순히  돈이 많아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돈과 교양, 그리고 자신들을 둘러싼 비옥한 토양과 단단한 성, 재빠른 속물성이 작동해야 가능한 곳일 터이다. 굳이 "출세"할 필요가 없이 세상에서우뚝 솟아 있는 양지.


그래서 소설 속에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어서 겉도는 건 개츠비만이 아니다. 고향의 명문가 출신으로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동부에 왔으나 모두가 고문당하는 듯한, 영원히 뒤틀린 데가 있는 듯한 동부에 적응할 수 없었던 닉, 대학 시절이 지나치게 화려해서 이후는 줄곧 내리막인생인 것처럼 보였던 데이지의 남편 톰, 뛰어난 미모와 사랑스러움, 풍요로운 환경을 가졌으나 사랑의 언어에서마저 돈 냄새를 풍겼던 데이지.


“이제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톰과 개츠비, 데이지지와 조던과 나는 모두 서부 출신이었고, 어쩌면 우리는 왠지 동부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어떤 결함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p. 247


개츠비는 죽고, "촌스러운 결벽증"의 소유자 닉은 이 냉정하고 도덕이란 없는 곳에 환멸만을 느낀 채  서부로 돌아간다. 데이지와 톰도 여기 저기 핫한 도시들을 겉돌며 살아갈 것이다. 귀향을 선택한 닉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다. 애처롭게도  개츠비만이 끝내 자기 삶의 끝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매주 수백명의 사람들이 개츠비의 저택에서 먹고 마시고 놀았지만 장례식에는 아버지와 서부 촌드끼 닉과 이름 모를 손님 뿐이었다. 개츠비의 출세는 개츠비가 진정 원하는 걸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출세란 무명의 이방인에서 유명한 이방인이 되는 일의 다름 아니다. 그저 갑자기 세상에 떠오른다는 건 어쩌면 이방인을 명백하게 집중 조명하는 일일 뿐이다. 토양까지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다. 출세란 백일몽 속에서 잠시 찬란했다 꺼지는 일이다. 그걸 잠시 잊게 해준 게 아무리 개츠비였다 해도 개츠비 역시 얻지 못했던 토양은 우리에게 쓴잔을 들이키게 한다. "그 꿈이 이미 자신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너머 광막하고 어두운 어떤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습지에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지만 양지의 나무들이 결탁해 습지로 드는 한줌의 해를 막고자 한다면 결국 습지의 생물로, 음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화려함이 끝나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닉은 개츠비가 죽은 뒤 개츠비의 불꺼진 저택에서 누워 "개츠비가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 느꼈을 경이감에 대해" 생각하며 개츠비의 꿈을 이해한다. 개츠비라는 존재의 의미를.


"그리고 달이 점점 하늘 높이 떠오르면서 실체도 없는 집들이 녹아 없어져 버리자 나는 서서히 그 옛날 네덜란드 선원들의 눈에 한 때 꽃처럼 찬란히 떠올랐던 이 옛 섬-신세계의 싱그러운 초록색 가슴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섬에서 자취를 감춘 나무들, 개츠비의 저택에 자리를 내준 나무들은 한때 인간의 모든 꿈 중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꿈에 소곤거리며 영합했던 것이다.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매혹적인 한순간에 인간은 이 대륙을 바라보며 틀림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도,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심미적 관조에 어쩔 수 없이 빠져 버린 채 인류 역사상 마지막으로 놀라움을 느낄 수 있는 재능과 맞먹는 그 무엇과 직면하면서 말이다."p.253


개츠비의 꿈은, 그 초록빛을 향한 열정과 경이로운 감정은 어느 네덜란드 뱃사람들이 이 섬(롱아일랜드)을 발견했던 첫 발자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에게 경이로운 낭만과 환상을 심어줬던 꿈은 어느 청년에 이르러 고급 잔디로 자리를 내어주면서 그의 꿈에 영합했으나 그의 출세는 허망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인간계로 진입했으나 혀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던 개츠비. 그럼에도 그는 위대하다. 빈약한 토양에서 자라난 찬란한 환상과 그것을 향한 열망과 속앓이는 순수하다(빈약한 토양이기에 더더욱 현실을 벗어날 환상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톰과 데이지처럼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어도 도통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도 없는 그들의 삶보다 풍요롭다.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질퍽이는 땅에서 희망을 감지하고 낭만성을 획득해나가는 그의 능력은 빛이 나고 "위대"하다. 누구나 한 때는 품었을 만한 무한한 희망의 희생양이며, 그 희망을 열고 닫은 "개츠비"는 현실에 짖눌리지 않아 사랑스럽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p 254


고시촌 미장원 원장님은 말했다. 종로의 묵은 부자들이 수영 클럽에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지금 여기 있지 않을 거야, 라고. 어쩌면 강남 신흥 부자들의 봉은사가 아니라 북쪽의 묵은 부자들이 바글거리는 조계사로 터를 바꾸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인생은 다른 모퉁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내가 집안일을 안 시켜야 출세할 수 있다는 건 타당하지 않다는 걸 시어머니도 알고 있었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전쟁이나 혁명, 통일, 외계인의 지구 접수 같은 거대 이벤트가 아닌 이상 우리는 이대로 한동안 신세 한탄을 하며 출세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거나, 출세는 귀찮은 것이라 생각하며 생을 근근히 유지해 나갈 것을 내가 잘 안다. 출세를 꿈꾸었던 세대는, 끝이야 어떻든 개츠비처럼 후세에 전해줄 위대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이 곳은 숨은 이야기들의 요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여기 이 기슭에 있을 만한 사람으로, 떠나게 된다면 나는 또 거기 있을 만한 사람으로 남아 생을 살아가야지. 가능하다면 자식들의 낭만적인 꿈과 희망에 영합하면서!? "얘들아, 출세해볼 생각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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