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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Sep 11. 2023

위대한 계면 활성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엄마, 저도 같이가고 싶어요." 엄지 작가들과 함께 고전 소설 속 식사를 재현하고 책 수다를 떠는 날이다. 딸이 함께 가고 싶다고 예전부터 이야기해왔고 나도 장소만 허락한다면 함께 가고 싶었더랬다. 이번엔 장소가 좁기도 하고 술도 마셔야 해서 중학생을 데리고 가기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렵다. 데려가야 할 무게, 부피와 겉면적이 몇 배가 늘어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다. 무려 중2지 않은가.


장소는 구옥을 레모델링한 터라 공간이 작게 분할되어 있었다. 우리는 네 개의 공간 중 부엌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 요리 담당은 아지다. 나는 과일을 준비했다.  시간이 다 되어서 부랴부랴 나선다. 남편을 졸라 차를 타고 시장에 들러 딱딱이 복숭아를 산다. 동그라미 안에 혹을 감춘 듯한 곡선이지만 맛은 괜찮을 것이다. 엄지 작가 중 쟝은 복숭아집 며느리이니, 더 신경 써서 사야 할 텐데 아무리 봐도 다 같은 복숭아다. 


아이와 첫 대면한 엄지 작가들은 기꺼이 환대해준다. 나는 경계가 도드라지면서 굳지만 애써 윤활해본다. 오늘의 고전 식탁은 맥주와 '식은' 통닭구(우리는 조각닭)이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와 톰(부부)이 개츠비를 어떻게 엿 먹일지 열심히 합의하는 중이다. 닉에 따르면 식탁엔 맥주와 '식은' 통닭이 놓여 있다. 


내 상상에 따르면 둘의 대화는 이렇다.

데이지 : 사람을 쳤어요. 개츠비는 조수석에 있었고, 내가 운전을 했어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어두웠고 나는 무서워서 계속 달렸죠.

톰 : 데이지, 그럴 리가 없어. 자자. 진정하고.  당신이 운전석에 앉았다거나 사람을 친 일은 없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니 아무 말도 할 게 없는 거야. 알았지?"

데이지 : .........(이 비열한 놈이)

톰 : 알았냐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데이지 :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톰 : 우리가 아는 건 사람을 친 노란 차가 개츠비의 차라는 것뿐이야. 그 이상 우리가 뭘 알지?

데이지 : ...........(수작하는 능력이 발군일세)



데이지는 침묵만 하면 그만이게, 톰은 사람을 치여 죽인 차가 개츠비의 차라고만 하면 그만이게 짜인 시나리오. '노란차는 개츠비의 차'라는 사실만 언급해도 개츠비가 죽게 되는 기가막힌 시나리오. 손하나 까딱 않고 살인자를 바꿔치기 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상류층의 살인법이 이 맥주와 '식은' 통닭 앞에서 뜨겁게 논의된다. 개츠비의 환상과 꿈과 사랑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 개츠비는 데이지를 걱정하며 데이지 집 밖을 서성인다. 닉이 별 일 없을 거라고 하자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차에 치인 피해자(톰의 정부)의 남편에게 살해당한다. 


이 잔인하고 씁쓸하고, 토가 나올 만한 장면엔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사랑하는 치맥이 놓여있다. 치맥에 대한 모욕이지 않나? 치맥이 겪어낸 모욕의 순간이 세상에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니 치맥이 땡긴다. 암튼, 당시 이 음식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맥주는 와인이나 위스키보다는 대중적이었을 듯하고, 통닭 역시 소고기를 즐기는 미국인들에겐 꽤 대중적이고 신속한 요리 중에 하나였을 듯하다. 식욕과 술욕을 함께 채우기에 치맥만한 게 없다는 걸 당시도 이해했던 것일까. 아지는 닭을 손질한다. 나는 버터를 뭉갠다. "그렇게까지 녹여야 하나요?" 아지가 묻는다. 나는 깨닫는다. 불필요한 전처리라는 걸. 나는 이렇게 아이와 함께 녹아들고 싶은데 버터만 녹이고 있다. 




늦게 등장한 나리쌤이 다소 어색한 모녀 사이를 채운다. 나리쌤과 맥주를 사러간 딸.(좀 먼 데로 다녀오길) 딸이 없는 틈은 어쩐지 조금 편안하다. 나의 경계만 신경 쓰면 되는 일이니까. 본격적으로 요리가 시작되었다. 아지가 녹인 버터와 재료들을 넣고 버부린다. 바질, 마늘, 버터를 듬뿍 바른 조각 구이 중 2/3이 오븐으로 직행, 1/3이 프라이팬에서 끓는다. 지글지글 닭이 익어가고 도글다글바글 하니와 아지의 대화가 익어간다. 지글 사이를 채우는 하니와 아지의 대화 덕분에 마음이 안정된다. 최근엔  채친 감자를 볶다가 간장을 뿌리면 맨살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순간 소름이 돋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껍질이 있는 음식을 조리하는 건 뚜렷한 이유 없이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닭이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 어린 이방인이 있으니 대화를 나누는 순간들에 조금 더 긴장하게 된다. 나는 신경이 곤두선다. 불만이 쌓인다. 누군가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마스크를 얼굴 눈밑까지 바짝 올려 쓴 것도, 머리 더듬이를 내린 것도, 대답 하는둥 마는둥 웃고만 있는 것도. 집에서 "예"라고 또박또박 대답할 것, 마스크는 벗을 것, 말을 끝까지 정확하게 할 것 등을 다짐받고 왔어야 하는 건데 후회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내 애만 아니라면 다 괜찮은 중2라는 것, 이 두 가지 이유에서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머리속을 경직시킨다. 아이에게 한 시간 정도 지났으니 집에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가고 싶지 않은 눈치다. 다음엔 '시간 제한'도 추가할 것.


닭이 노릇노릇 익었다. 신대륙의 초록 꿈 위에 노릇한 조각 닭이 올라간다. 맥주도 준비되었다. 입안을 상쾌하게 할 복숭아까지. 술이 들어간다. 우리들의 계면은 술로 활성화된다. 계면활성제는 경계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흔히 유화제라고도 알고 있다. 물과 기름의 경계를 활성화해 섞이게 해준다. 기름때를 벗기고, 화장품을 만들 때 오일과 물을 섞어준다. 술이 들어가니 대화가 부드럽게 섞인다. 더 마시니 어쩔, 마음의 때도 벗겨주는 것 같다. 몇배의 부피와 겉넓이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 나의 무게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진 느낌이다. 엄마가 붕 떠오르는 순간, 아이는 가라앉아 잠이 들었다.



아 맛있다 맛있어. 방학의 막바지라 더 꿀맛이다. 톰과 데이지는 왜 이 맛있는 치맥을 외면했나? (살인을 하고 뭘 먹으면 사람 아니다만) 나는 식욕 술욕을 잊을 정도로 타인과 어떤 문제를 긴박하게 논의해본 적이 있던가? 톰과 데이지는 분명 잊었다. 치맥도 사건 직전의 그들도. 분명 맥주가 필요했던 타이밍이었지만 톰과 데이지는 더이상 계면 활성제가 필요치 않았다. 둘 다 바람을 피우고 있었지만 개츠비를 상대로, 부부의 이해관계가 하나가 되자 그전까지 분명했던 계면은 사라졌다. 모처럼 부부의 애틋함이 살아나기까지하지 않았을까? 데이지는 톰의 재빠른 합리화와 뻔뻔함을 용감하고 믿음직스럽다고 느꼈을 테고, 톰은 조강지처를 살릴 방도를 찾은 자신에게 자뻑하고 있었을 테지.


세상은 왜 이런 파렴치한에게 더 유리한지 분노가 치민다. 이 비극에서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부를 물려받은 계급이다. 톰의 정부 머틀은 죽었고, 머틀의 남편은 아내를 잃은데다 엉뚱한 사람을 죽여 살인자가 되었으며, 개츠비는 데이지와 톰의 계략에 휘말려 죽었다. 이것이 신대륙의 초록을 가슴에 품었던 최초의 꿈이 다다른 한 지점이다. 개츠비의 고급 잔디에 영합해 푸르름을 내주었던 신대륙의 꿈은 빛을 잃고 접시 한 켠을 차지하는 장식용 따위가 되었다.


현대인을 뭉치게 하고 흩어지게 하는 단 하나의 기제가 있다면 그건 이해관계일 테다. 꿈은 산산조각 나고, 사랑은 그 앞에서 쉽게 식는 법이다. 탁자 위의 식은 통닭은 개츠비의 사랑이자 환상이다. 쓴잔을 들이키는 건 톰과 데이지의 일이 아니라 개츠비의 일이고 말이다. 사람들 사이 계면활성제로 이해관계가 효과가 좋을까, 술이 더 좋을까? 톰과 데이지를 봐도 내 주변을 봐도 이해관계만한 게 없을 것 같다. 고로 개츠비가 위대한 건 이견이 있을 지 몰라도, 위대한 계면활성제에 관한 건 아무래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씁쓸하게도.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다. 명절이면 할아버지 성묘를 가는데, 콜라를 사서 뿌려드렸다. 아버지는 술 한 숟가락만 먹어도 응급실에 가야 할 정도다. 나도 술은 잘 마시지 못했다. 첫사랑을 처음 만났던 날 소주 1병을 마셨던 일을 계기로 꾸준히 시도한 끝에 술을 어느 정도 먹게 되었지만 술의 쓴 맛에는 여전히 예민하다. 오늘의 술은 쓰지 않았다. 이해관계가 없는 곳에서는 무엇이든 달콤한 것인가. 헤어지는 순간 아이가 옆에 있어 좋았다. 이 기분을 왜 이 장소로 올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겪어 내야만 알 수 있는 일이 꼭 있다. 다행히 나와 아이는 관념에 갇힌 관계가 아니므로 이 경험이 더욱 소중하다. 오늘 어땠어? "재미있었어요." 음....일단 그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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