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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Nov 09. 2023

학교 임원, 관노의 삶

심청은 눈 먼 아버지를 찾기 위해 왕비가 되어 전국 맹인을 위한 잔치를 연다. 오늘은 오실까, 내일은 만날 수 있을까, 고대하면서. 미국의 위대한 개츠비는 5년동안 출세의 동기가 되었던 여자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매일 대저택에서 파티를 연다. 그녀가 올까? 혹여 그녀를 아는 누구라도 만나길 고대하며. 나도 심청과 개츠비처럼 2년 동안 학교와 교육청 예산으로 학부모를 대상으로 나름의 잔치를 진행하고 있다. 플라워 클래스도 열고, 가족 요리프로그램도 진행하며, 고추장만들기도 한다. 다음해 학부모회 일을 맡아 임원이 되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오늘의 잔치는 정치인들과의 간담회이다. 곧 선거철이다. 학교 운영위원장으로서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을 모시고 학교에서 간담회를 주최한다. "~땡겨줘"의 계절. 학교는 소극적이라 나서주지 않고, 간담회 신청서와 기간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물론 사정이 있겠지만.구청장은 이미 관내 학교를 모두 돌고 예산을 탕진한 상태라 구청 예산은 신청할 수 없단다. 때늦은 발견.


의원님들 쪽이 남았다. 지역의 의원님들을 모으고 학교와 일정을 조율해서 드디어 간담회를 열었다. 학부모회 관련 조직과 인원들을 동원해서 간담회 장소로 모이도록 독려한다. 오늘은 이 가운데서 예산도 땡겨오고 나의 데이지도 만나고 싶다. 가능할까? 이 잔치에 온 누가 나의 바람을 실현시켜줄 것인가.


2년 전 나도 누군가가 급하게 찾던 한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한창인 겨울이었다. "시의원께서 교육청 예산을 받아주겠다고 해서 간담회를 열까 해요."라고 초등학교 운영위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부모 7명과 시의원이 옥탑의 작은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운영위원장이 운영위원회 위원이 되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좋다고 했다. 할일은 거의 없다니까.


다음날 전화가 왔다. "학부모회 회장"을 해줄 수 있겠냐는 거였다. 수락했다. 할 일이 별로 없다니까. 학부모회 임원 구성을 위해 지인에게 전화를 돌렸다. 까였다. 전년도 회장에게 물었다. "혹시 학부모회 회장의 일이 까이는 걸까요?" "아니예요"라는데, "아니"었다. 할일도 많았다. 학부모회 연수를 1년 동안 5번 진행했다. 첫해 내내 진행한 잔치는 성공적이었으나 임원이 될 누군가를 찾는 일은 허탕이었다. "오늘 어떠셨어요?" "좋았어요"가 떨어지면 바로 "그럼 다음해 임원"을 던지지만 공허하다.


올해는 적극적으로 찾는다. 학부모 대상 연수로 고추장을 만드는 날이다. 뉴턴을 닮은 강사분이 오셨다. 뉴턴과 빨간 고추장을 만드는 기분이라 잠깐 흥분했다. 임원들 테이블을 지나 모르는 이가 드글드글한 테이블에 앉아본다. 요리조리 대화를 붙인다. 세 아이 중 접점이 있는 지 먼저 점검한다. "아이가 몇 학년이예요?" "왜요? 호구조사라도 하시게요?" 글렀다. 이 테이블은 너무 맵다. 잘못 앉았어.


고추장 만들러오신 강사님은 돌아가는 길에 말씀하신다. "학교 일하는 학부모는 신종 관노라고 하죠." 그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배어나온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끄집어 내려 힘이 들어간 입꼬리가 마음에 든다. 감추고 싶지만 감출 수 없는 커리어가 아닌가. 그나저나 관노는 다른 관노를 섭외하는 데 또 실패했다. 그럴만도 하다.


임원이 되면 치맛바람 가능한가? 안됨. 절대 불가. 자식이 잘나서 임원이 된 경우가 아니라 그런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알까 두렵다. 매일 아침 인사나오신 교장 선생님께서 아들 머리의 비듬을 알아챈다거나 찢어진 신발(새신발을 안 신겠단다)을 알차잴까 자식 이야기는 입도 뻥긋 안 한다. 자식 객관화와 자기 객관화가 충분히 넘치도록 달성된 회장이므로, 더더욱 입꾹. 교감 선생님께서 회의중 말씀하셨다. "이번 일은 학부모가 아니라 꼭 위원장으로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전 아이들 엄마로서 자의식이 별로 없어요" 교감님과 교장님 모두 수긍하셨다는 썰.


이익이 있는가? 이익 없다. 내가 회장이 되었을 때 제일 고민했던 건 더치페이다. 모이면 회장이 계산해야할 것 같은 불문율에 압박을 느꼈다. 학부모회 회비가 있지만 간식비로 쓰는 건 어려웠다. 첫해에는 아는 게 없어서 임원들과 자주 회의를 했다. 대체로 임원을 거쳐 회장이 되지만 나는 땅에서 솟듯 회장이 되었다. 사비를 쓰는 건 학부모회 자치활동에서 보기 싫은 장면 중 하나였다. 민주적이지 않고, 조직을 사유화하는 느낌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소신대로 각자 계산했다. 대신 최선을 다해 해야 할 일을 많이 했다. 몸으로 때우는 심정으로. 올해 예산 증액을 요청했고, 학부모회 간식비를 원칙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안을 요청했다. 막상 돈 쓸 일이 없다. 2년차의 위엄이랄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하는가? 오롯이 자신의 즐거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다. 산기슭에 사는 우리들은 평지에 대한 필요를 학교에서 채우는 편이다. 대도시에서 자연은 공평하지 않는다. 밀집 지역은 햇빛 빈자다. 학교처럼 열린 공간에서라면 자연은 공평하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서 흙을 만지고 해를 받는 헤택을 누려야 한다. 학교는 환하고 밝고 안전한 공간에서 학습하고 몸을 움직이기 위해 더더욱 절실한 공간이다.


학교라는 공간은 마을과 꽤나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를테면 학교 운동장을 주민에게 생활운동공간으로서 개방할 것인가의 문제를 논한다고 해보라. 나는 찬성이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막상 개방하고 보니 경찰이 오는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갈등 앞에 닫아 걸기만 한다면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안전을 위한 기능들을 플러스하는 편이 낫다. 그 과정을 설득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 이런 의사소통 과정 자체가 학령기 학부모로서만 겪을 수 있는 일이라 결과가 어떻게 되든 과정이 즐겁다.


직접적인 이익은 없지만 학부모로서 관노가 되어 공공의 영역에 있으면 학부모의 불만도 학교의 보수성도 전보다는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심봉사가 눈을 뜨듯 개안하듯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학부모화 학교의 관계는 어렵다. 수십겹의 외피 중 겨우 몇 겹 걷어냈을 뿐이므로.


교사 친구는 말했다. "학교에 있으면 학부모가 이상하고, 학부모 사이에 있으면 학교가 이상해." 명언이다. 진상 학부모는 거침없이 민원을 쏟아내니 학교는 민원으로 노이로제에 걸릴 판이고, 정작 의견을 나눠줄만한 상식적인 학부모는 소극적이라서 필요한 의견이 전달되기 힘들다. 이 두 사례의 경계에 많은 방관자가 있다. 학교의 일을 이해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불평이 많은. 이 가운데 분명, 관노들의 역할이 있다.


추가하자면 알리미에서 "다름이 아니오라"를 추방하기도 있다. 학부모회 주관 연수 프로그램에 알리미는 내가 쓴다. 계절인사와 "다름이 아니오라"는 없다. 공문서에 계절인사와 다름이 아니오라 퇴치 운동을 벌이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 법칙이 없다면 우리가 공문서를 알 길이 없을까 하여, 접는다.  


오늘로 돌아와, 간담회를 진행하기 전에 학교에 필요한 예산은 왜 정치권의 시혜적 태도에 기대야 하는 것일까?라는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지원들이 아닌가? 간담회를 열고 생각이 달라졌다. 학교의 상황이 모두 같을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두 앉은 자리에서 공평하게 나눌 수는 없을 일일테지. 비합리적인 듯 일리가 있는 오늘의 간담회는 정치인들의 친근하고 적극적인 태도에 낚인 건가 싶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데이지도 찾았다. 그녀는 심지어 80년대생 학부모고, 앞날이 창창한 1학년 학부모다. 나는 몸살을 얻었다.


막내가 말한다. "엄마는 돈 엄청 벌어요?" "아니" "엄마는 돈 엄청 버는 것 같아요. 바쁘잖아요." 누가 보면 실속 없는 관노의 삶을 비웃는줄 알겠다. 막내 덧붙인다. "전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 평범하게 회사랑 집이랑 왔다 갔다 하는 거요." 내년이면 학부모회 회장직도, 위원장직도, 아들의 피구 대회 뒷바라지도 끝이 나므로, 부풀어 오른 연봉은 거품을 빼고 안팎이 같은 모습이겠지. 섭섭할까? 남편과 밤늦게 동네를 걷다 보면 "회장님~~~"하고 인사를 나누는 일이 왕와 있다. 달콤해서 더하고 싶은 권력욕이 순간.....이래서 권력이 무서운 법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나는 순장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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