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일을 지내는 방식엔 두가지가 있다. 1. 태어난 해 음력 날짜를 올해 양력 날짜에 해당하는 날로 세기(해마다 생일 날짜 달라짐). 2. 태어난 해 양력 날짜로 세기(매해 같은 날짜). 결혼 전까지 1번 방식으로 생일을 지냈다. 매해 생일이 바뀌니 번거롭긴 했지만 익숙해서 친구들도 가족들도 생일에 딱 맞춰서 함께 해왔다.
결혼하고 두번째해 어머니는 2번 생일법을 언급하시며 “니는 태어난 해 양력이 9월 10일이대? 양력으로 해도(2번 방법) 되겠제?”라고 하셨다. 생일이야 음력이든 양력이든 대수겠나. 별 상관은 없었다만. 그 해 생일은 1번 음력으로 세면 내 생일이 남편 생일보다 며칠 앞이라 무척 고심하셨던 모양이다. 양력으로 하면 무조건 매해 남편 생일이 내 생일날보다 빠르니 안심일 테고.
친정 엄마에게 어머니 말씀하셨다. “야가 9월 1일로 하자고 해가 9월 1일에 지내기로 했어요. 남편 생일이 먼저라고 그래 지내자고 지가 먼저 그러더라고요.” 효부 스토리는 남편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생일엔 관심이 없었음'이라는 결백 증명은 과학수사대가 나서도, 김앤장 변호사를 선임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어머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 남편도 그동안 1번 방식으로 생일을 지내왔다는데 결혼하고 나서 2번으로 바뀐 거라니 참.
이렇게 해서 생일은 별안간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1번 생일날 톡으로 축하 메시지가 도착하고 가족에게 전화가 오고 선물이 도착한다. 그동안 생밍아웃을 못했다. 1년에 한 번 태어난 걸 축하받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말이다. 열심히 제사 전을 부치는 날 생일 축하 메시지가 잔뜩 올라와 있으면 그 톡방에선 생일날 전부치는 아줌마가 되어 있다. 생일날 전부친다고 말하면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 k 며느리의 이해도는 급이 다르다.
2번 방식의 남편 생일날 부모님을 초대해서 열심히 부부의 합동 생일 축하 상을 차린다. 잘 드시고 일어서며 말씀하신다 “아들 덕에 잘 먹었다”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한 아들 생일상이다. 아무리 뇌에서 고쳐 생각할래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일 용돈은 아들 며느리 각각에게 주셨다. 나는 가로채기, 아니 몰아주기를 종용한다.
부부 생일상을 한 번에 차려서 끝내고 싶은 모두의 마음을 알고는 있다. 문제는 남편 생일 전에 생일을 치르니 내 생일은 최소 10일 뒤라는 시간차가 생긴다는 점이다. 생일을 지낸 것도 안 지낸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다. 그런데 온 가족이 생일날을 잊고 지나가는 건 아니지 않나? 심지어 나마저도 생일을 잊는다.
새벽 자전거에 꽂힌 뒤로는 모든 일상이 자전거 타기에 맞춰져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일요일 아침 11시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는 찰나 딸이 말한다. “엄마 생일이잖아요” “아...그렇구나.” 덕선이처럼 남편 생일날에 맞춰 생일 파티를 하고 보니 스스로 태어난 날 자체를 잊었다. 나는 생일에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찐 무심을 겪고 보니 무심해도 될만큼 그동안 축하를 무리 없이 받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무시는 과거를 포장하고!
그러고보니 생일인 걸 알았으면, 축하를 해주던지 선물을 주던지 밥을 하던지 해야지, 생일 알람이 최선인가? 이런 건 기계도 한다. 메일함에는 생일 알람이 쌓였다 쌓였어. 갑자기 욱이 올라온다. 해서 밥을 대충 해주고 집을 나온다. 그때까지도 반응이 없다. 해서 자축한다. 근처 카페에 가서 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이 카스테라는 무려 2층이고, 딸기와 생크림까지 이고 있으니 남부러울 것 없는 케이크다. 맛을 보니 케이크에도 껍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프랜차이즈의 오래된 상품은 자축하는 생일자를 오래도록 기다렸던 거겠지. 천년 묵은 도깨비 빤쯔처럼 오래묵은 카스테라 질감은 질기고도 튼튼하다. 종이로 만든 케이크인가 의심이 갈 정도다. 애들에게 종이 케이크는 많이 받아봤는데 사서 먹게 되다니.
집에 돌아온다. 나는 스테레오타입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한다. 5시간 밖에 있었으니 시간은 충분하겠지. 아이들과 남편이 선물과 편지를 준비했다. 껍질 없는 부드러운 케이크도 함께 먹었다. 생각해보면 남편도 제 날짜에 축하를 받는 건 아니다. 둘다 생일을 제때 치르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님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남편의 마음을 뒤늦게 인지한다.
'시월드' 프레임, '가부장제'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생각해볼까? 부모님도 주말이면 우리 가족에게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신다. 우리는 행사가 있을 때 제사 때 명절 때 부모님 식사를 준비한다. 다섯 식구 특식에 부모님 2인분의 식사를 추가한다. 부모님은 케이크를 사오신다. 다섯 식구가 훨씬 더 많이 먹는다. 용돈을 받는다. 사고 싶은 걸 산다. 다음날 먹을 것도 남아 있다. 부모님은 만족스러운 저녁을 드셨다. 며느리에게 고맙다. 훌륭한 하루가 아닌가. 프래임 바깥이 더 따뜻하고 말랑하다.
시어머니가 집착한 전통적인 생일 프레임은 어머니의 것이다. 그 프레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나는 왜 거기에 갇혀 있었을까? 타인이 짜놓은 프레임에 내가 들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갇혀 있는 건 온전히 내 선택이다. 해묵은 틀에 함께 갇혀 다채로운 그날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쏭 언니를 만나러 분당에 가는 길, 클래식을 듣다 보니 자연이 더 아릅답다. 자연이 아름다우니 클래식이 더 아름답다. 쏭 언니를 만나 연잎밥을 먹는다. 언니가 빨간 상자를 꺼낸다. 지난 여름 만나고 몇 개월 만에 본 언니. 올해는 주홍에 빠져 있다는 내 이야기를 마음에 담았던 언니가 뒤늦은 생일 선물이라며 주홍에 다홍을 몇방울 떨어뜨린 니트를 선물했다. 가을 잎을 떨군 감나무에 잘 익은 감이 남아 있다면 이 주홍일 것이고, 해너미가 눈물을 쏟게 한다면 이 색일 것이다.
햇살은 좋고 공기는 차갑고 마음은 주홍으로 가득 찼다. 생일은 어느 때고 마음을 받을 수만 있다면, 여름에 태어나 가을에 받아도 행복한 걸. 태어나길 잘했어. 홍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