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에 빠지다
2023년 6월은 낯섦과 설렘이었다. 나의 인생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인 딸과의 유럽 여행이 15박 16일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밀라노에서 시작된 여행은 베로나, 베네치아,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끝이 났는데, 겨울의 초입에 접어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서지는 하얀 햇살과 정의할 수 없는 강렬함이 마음속에 일렁인다.
프랑스 드골 공항에서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뒤엉킨 긴 입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환승하여 밀라노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물먹은 솜이 되었다. 적지 않은 비용이었지만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던지듯 가방을 놓고 깊은 잠에 떨어졌다. 사실 딸아이는 타국에서 홀로 지내는 삶에 지쳐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버킷리스트 한 꼭지 이루고픈 욕심에 딸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여행을 강행했다. 편안한 여행을 장담하며 항공권, 기차 예매, 호텔 예약, 그리고 현지에서 참여하는 각종 투어를 예약하고 시작했지만, 긴 비행 시간과 환승으로 출발부터 피곤해지자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딸의 눈치를 보았다. 막연히 꿈꾸었던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딸과의 여행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말 그대로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여행 첫 도착지였던 밀라노는 특히 그랬다.
화려한 고딕 양식을 자랑하는 두오모 대성당의 뾰족한 첨탑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는 특별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쉽게 담을 수 없었다. 급기야 점심으로 매운 파스타를 먹고 느닷없이 배탈을 일으킨 딸은 성당 내부 관람 도중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여행은 자고로 들뜨는 기분과 함께 시작되어야 제 맛인데 성당 앞 광장에 앉아 이온 음료로 화난 뱃속을 다스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딸의 얼굴에서 세상 귀찮다는 표정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