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전국여성독후감대회 <문화체육부장관상> 수상작
P.S
완성된 글을 쓰기 위한 저만의 프로세스로
공모전에 종종 도전하고는 합니다.
도전했던 공모전 중 감사하게도 당선된 작품이 있고
아쉽게도 탈락한 작품은 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사유의 궤적이기에 이 글들이 저에게는 참 기특하고 뿌듯합니다.
작품이라는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작은 끄적임들을 이 페이지를 통해 나눕니다.
이 글은 "스칸디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황선준, 예담, 2013)"을 읽고 십여 년 전에 쓴 글입니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 얄밉기까지 한 9월 무렵이었다. 이제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만도 한데 아직도 늦더위가 한창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로 여름은 더 힘든 계절이 되었다.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은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이터며 물가로 나를 끌고 다녔다. 그에 대한 훈장으로 얼굴에 기미와 주근깨가 터줏대감 마냥 자리 잡았다. 그럴 때 나에게 찾아온 고마운 손님이 있었다. 바로 “스칸디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는 책이었다.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암호명인 마냥, 우린 늘 서둘러야 했다. 누구보다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는다는 허상에 사로잡혀, 방향보다는 속도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문화. 나도 그 문화 속에 어느새 젖어 속도를 내며 아이들이 누구보다 빨리 성장하길 바라며 키우고 있었던 그때. 스칸디에서 온 편지는 나에게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다정스레 이야기해 주었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느껴도 늦지 않는다고 조언해 주었다. 먼저 앞서 가는 무리를 뒤에서 바라보며 천천히 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간표는 저마다 다르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속도가 결코 아님을 깨닫는다. 자녀 양육은 올림픽이 아니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의 결과만이 중요한 승부가 결코 아닌 것이다. 선물로 온 아이들이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부모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책 속의 마음에 와닿는 좋은 내용들이 참 많았지만 그중에서 특히 마음의 끈을 오래도록 잡아두었던 부분들을 나누고자 한다.
첫째, 아빠의 육아 역할에 관한 부분이다. 스웨덴 가정에서는 언제나 아이가 먼저이며, 부모는 아이의 양육에 대해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부부는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공동의 책임자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킬 의무가 있다고 한다.
나의 가정은 어떤 모습인가? 아빠의 육아 참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빠의 늦은 귀가 시간이다. 보통 주중에 한 번 아니면, 아빠와 아이는 한 번도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다. 과도한 업무량에 야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 지 오래고 아이들은 그만큼 주중에 아빠 얼굴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자연스레 엄마인 나의 육아 근무시간은 연장되고, 자연스레 육아의 결정권 또한 내가 많이 갖게 되었다. 결국 아빠는 육아에 있어 영향력은 희미해지게 되고 가정에서 돈 버는 현대판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이 비단 나의 가정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저녁에 일찍 와서 함께 밥을 먹고 놀아주는 아빠를 둔 아이들은 그야말로 요즘 시대에 “로또”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것보다는 이러한 현실 가운데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을 모색하는 것이 지혜로우리라 생각된다.
나도 현실을 핑계로 남편을 육아에 소외시키기도 했다. 나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아빠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내 기대치만큼은 아빠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질책하기 일쑤였다. 현실 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아빠 역할을 안내해 주고, 그 역할을 해낼 때 칭찬하고 격려해 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가장과 아빠로서 자녀 양육에 대해 조언해 줄 때, ‘당신이 몰라서 그런 소리한다.’는 핀잔보다는 육아에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남편이 육아 변두리에 서성이지 않고 중심부에서 조력자로 설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보다 남편의 의견을 물어보고 귀를 기울이며 항상 함께 의논하고 결정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오늘도 역시나 아빠를 보지 못하고 두 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아이들의 하루치의 성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함께 웃고 고민하며 아이를 키우려 노력하고 있다. 엄마 혼자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보다 아빠 엄마 둘이서 의견을 맞춰가며 아이를 덜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낫다는 모자란 교육관을 가지고 말이다. 물론 현장에서 육아 노동의 양은 엄마가 훨씬 많겠지만, 아빠도 회사에서 열심히 돈을 벌며 또 다른 형태의 육아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시간조차도 중요한 육아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서로의 교육관을 조율하고 육아의 방향성을 고심한다. 다른 집의 육아방식을 표방하기보다는 우리 가정과 우리 아이에게 맞는 최선을 선택하며 걸어가고 있다. 그 걸음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지만 성장을 향한 길이기에 멈추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련다.
스칸디 아빠의 근무 환경은 우리나라와 너무 상이하기에 대한민국의 아빠들에게 스칸디 아빠처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대한민국의 아빠에게 맞는 대한민국형 아빠 역할을 고민하고 현실 속에서 최선을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무시한 요구는 또 다른 문제를 낳기에 각 가정의 현실을 고려한 대안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현자가 말한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둘째, 놀이와 관련된 부분이다. 스칸디 부모들은 ‘잘 놀아야 잘 큰다’는 철학으로 충분한 놀이 시간을 아이들에게 제공하고 학습보다 놀이를 우선에 둔다. 그리고 아이들이 무슨 놀이를 하던 부모가 함께 하려고 한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놀이는 남는 시간에나 허용되는 일종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딸이 또래 친구들이 없는 놀이터에서 “친구들은 놀이터에 안 나오고 다 어디 갔어요?”라고 묻는다. 학교 수업 후에 집으로 곧장 오는 딸은 늘 놀이터에서 함께 놀 친구를 구해 달라고 조른다. 친구들이 학원에 가서 놀이터에 못 나오니 친구 만나러 학원이라도 다녀야겠다며 학원을 보내 달라고까지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교와 동시에 어느새 모여든 학원 차들에 태워져 홀연히 사라진다. 아이들은 꽉 짜진 학원 일정을 소화하고 나서야 그에 대한 대가로 노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니 자연스레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엄마는 놀이친구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삼십 대 중반이 된 나는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하지만 정말 체력적으로 힘들고 아이 친구들이 혹시 안 오나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그래도 놀이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포기할 수는 없다. 안타까운 것은 초등학생 고학년만 되어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엄마의 눈을 피해 구석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러 나온 아이들이다.
놀아본 아이들이 놀이의 맛을 알고 놀이를 지속적으로 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놀이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야말로 놀이다웠다. 매일 동네 공터에서 친구, 언니, 오빠, 동생들로 구성된 몇 십 명의 무리들이 해가 지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엄마들의 “밥 먹어라!”는 소리와 함께 한 명씩 엄마들에게 붙잡혀서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어김없이 우리는 공터에 다시 모여 놀았다.
그런데 30년 뒤의 놀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 됐다. 범죄사건사고가 많아져 아이들을 밖에 내놓기에 걱정스러워졌고, 함께 놀 아이들은 사라졌고, 방과 후 수업과 학원 등으로 놀 시간은 줄어들었다. 놀이가 학습과 소비의 수단이 되어 순수하고 자유로운 놀이를 누릴 아이들의 권리는 박탈당했다. 아이들은 공간과 시간, 친구들만 있으면 너무나 잘 논다. 놀이가 자신의 의무인 양 정말 열심히 재미나게 논다. 그런데 지금 어른들의 불안감에 저당 잡혀 놀이 대신 학습을 하게 되고, 학습에 대한 대가로 약간의 놀이를 하도록 허락받는다. 언제까지 이 감옥 같은 일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OECD 국가 중 청소년의 행복감 수치가 최하위이고 자살률은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놀이를 다시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대안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오늘 우리 아이들이 신나고 즐거운 놀이 시간을 가졌나?”라고 적힌 메모지가 붙여있다. 그 메모지를 볼 때마다 두 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 놀이를 학습으로부터 지켜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한다.
셋째, 교육과 정치의 상관관계 부분이다. 스웨덴의 복지 철학에는 평등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국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를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위 ‘개천에서 용 나게’해주는 것이 스웨덴이란 나라의 국가의 역할이다. 그래서 스웨덴의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특별히 더 돈을 벌고 저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스웨덴의 이런 부분은 대한민국의 부모로서 부럽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의 가계 지출 비용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교육비이다. 이 교육비 때문에 맞벌이를 선택하게 되고, 아이는 엄마 품이 아닌 어린이집과 학원·방과후 수업과 돌봄 교실의 품에서 자라게 된다. 내가 아는 어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집에 일찍 가서 쉬고 싶은데, 자기 집은 오후 5시까지는 들어갈 수 없어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이 얼마나 씁쓸한 이야기인가? 또한 워킹맘들은 회사일과 가사, 자녀 양육에 대한 죄책감까지 짊어지고 쉴 틈 없이 살아간다. 아이들 옆에 있어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경력단절을 불사하고 전업맘을 선택한 나 같은 사람도 외벌이 살림에 빠듯하기만 하다. 남편의 월급으로는 네 식구 먹고살기가 팍팍하고 경조사가 있거나 명절이 있는 달에는 걱정부터 앞선다. 아이의 학원 보내달라는 이야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일쑤다.
우리나라에서는‘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미 옛 말이 되어 버리고, ‘출산율이 너무 저조하여 몇 백 년 뒤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폐마저도 불확실하다.’는 극단적인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정말 우리의 살 길은 무엇인지 막막하고 답답해진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공교육에서도 주입식 교육보다는 창의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마을 학교 같은 공교육 보완 사업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분노하며 안주하기보다는 함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실현 가능한 노력들을 해내 보이는 사람들이 많기에 지금 보다는 미래가 더 아름다울 거라 기대해 본다. 그러면 언젠가는 국가가 아이 교육에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출산율도 증가하고 부모들의 교육비 부담도 낮아졌다는 꿈같은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 전해 질거라 믿는다.
또한 스웨덴은 학교 차원에서 교육 자치가 잘되어 있다고 한다. 스웨덴은 의회, 정부, 그리고 국립교육청이라는 세 개의 기구가 있고 그 아래에는 ‘콤뮨(kommum)’이라는 290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콤뮨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걷은 세금과 정부가 콤뮨에 재교부하는 세금으로 교육, 사회복지 등의 각 분야에 얼마나, 어떻게 쓸 것인지를 알아서 결정한다. 이런 재정적인 자율권이 있기에 학교 차원에서 교육 자치가 가능한 것이다.
반면 한국 실정을 보면, 지방교육청에 들어오는 예산의 대부분이 정부에서 나온다. 2008년의 경우, 전체 교육 수입의 73%가 중앙정부에서 걷은 세금으로 지방에 교부하는 금액이었다. 이처럼 한국의 교육 재정은 스웨덴의 경우보다 경제성장과 더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경제성장률을 5%로 잡았는데 만약 3%에 그치면 교육에 배당되는 예산은 그야말로 몇 천억이 줄어들게 된다.
매년 반복되는 누리과정 지원금 문제도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현재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는 둘째가 있기에 이 문제가 피부로 다가온다. 누리과정 지원금이 나오지 않을 경우 우리 같은 외벌이 가정은 30만 원이 넘는 원비를 충당하기 힘들어 퇴소를 선택하게 되고, 맞벌이 가정의 경우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살림을 해내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빈부의 격차가 교육의 격차를 낳고 삶의 질의 격차를 낳고 결국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란 절대 가치조차도 흔들리게 된다.
이런 일들을 봤을 때 교육은 결국 정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부모의 능력과 관계없이 자녀가 평등한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 지대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지방자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아이 하나만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살아갈 국가와 세계에 대한 관심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소모임을 결성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해 나는 “엄마 짱! 마음 짱!”이라는 모토를 가진 “맘짱”이란 엄마교육동아리를 결성하고 리더를 맡고 있다. 전문 강사님을 모시고 부모교육을 받고, 한 달에 한 권 양육 서적을 선정해서 읽고 토론하며 삶의 적용점을 함께 찾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이 모임이 얼마나 유지될까 싶고 괜한 일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두려워 시작도 못하는 어리석음보다는 무모한 도전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출발선 앞에 섰다. 중간에 네 명 중 두 명이 관두는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것이 옳은 길이라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꾸준함을 선택했다. 열 달이 지난 지금은 여섯 명의 엄마가 매주 화요일에 모여 열띤 이야기들로 3시간을 꽉 채우며 행진하고 있다. 그리고 더디지만 긍정적인 엄마의 변화에 아이들이 변하고 가정이 행복해지는 작은 기적들을 맛보고 있다.
성장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엄마들이 모임을 만들고, 주민센터와 주변 기관들이 장소와 필요 장비들을 제공해 주며, 국가에서 이런 모임에 전문 강사 인력들을 배치해 준다면 곳곳에 이런 긍정적인 변화들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질 높은 양육 환경에서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하고 행복한 어른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아이를 또다시 길러내 결국 우리나라는 "행복"해 지리라 믿는다.
성공은 확정적이지 않고 실패는 치명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려는 용기이다.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소리만 나도는 이 시기에 나는 감히 우리나라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다만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부모라는 역할이자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길 기도한다.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시가 한 편 적혀 있다고 한다. 그중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는 대목이 있다. 나만 최고의 것을 취해 나와 내 아이만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세상에 내놓고 나누어서 서로가 최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길 소원해 본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더불어 공존하고 협력하여 성장과 관계의 균형 잡고 살 길 바란다.
스웨덴에서 온 편지 한 통이 많은 생각과 고민과 결단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 결단을 잘 지켜낼 수 있도록 틈이 나는 대로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 놓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다. 그런 모습에서 ‘내가 진짜 엄마가 되어 가는구나’라는 뿌듯함이 입가에 퍼진다. 정말 고마운 손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