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영편지 28

03월 21일-아빠가

by 순례자

사랑하는 아들아!


사방이 고요하구나. 창밖은 무거운 어둠이 깔렸다. 아직 학교야.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의 고요와 적막 속에 벽시계의 째깍 거림만이 빈 사무실에 울리는구나. 시계는 하루 종일 같은 소리를 내며 쉼 없이 달렸을 텐데 저 소리를 이제야 듣는구나.


아빠는 그런대로 작년보다 여유롭게 모든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어.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배우게 된다. 열심히 성실하게 몸 아끼지 않으며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돌아보면 후회되지 않지만 주변을 돌아보면서 좀 더 에너지를 아끼며 열심히 보다는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구나. 요즘은 여전히 바쁘지만 여유롭게 일정을 예측하면서 지혜롭게 일을 하니 마음의 여유도 있고 지치고 화나는 일도 별로 없구나.

저녁 먹고 씻고 내무반에 들어왔겠구나. 동기들이 위안이 되고 웃음이 되면 참 좋겠다. 우리 아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으면 콧등을 찡그리며 큰소리 웃으면서 유쾌하게 리액션을 해서 전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지. 내무반에 유머가 넘치는 재밌는 친구가 있으면 군생활이 훨씬 즐거울 텐데, 그런 친구가 있니?


대학 입시는 여전히 치열하고 긴장된단다. 진학부장으로서 오늘은 입시 설명회를 했어. 일명 드림반 아이들, 소위 SKY와 의대를 준비하는 꿈나무 1, 2학년 들이다. 아빠가 각 대학의 정보를 소개하고 소위 합격자들의 스펙을 요약할 때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하고 사진 찍는 엄마들의 긴장된 분위기는 이 공간에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것 같구나. 몇 년 누적된 정보와 지난 몇 달 동안 각 대학 설명회를 부지런히 다니고 입학사정관들을 부지런히 만나서 정리한 자료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한 입시 전략으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내 모습이 옳은 일을 하는 것인가 하는 반문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1, 2학년 많은 재학생 중에 선택된 이 소수의 아이들을 위해 따로 시간을 마련해서 특별한 정보를 제공하는 나는 좋은 교사일까?


이곳에 초대받지 못한 대다수의 학생들과 부모님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한국의 입시 현실에 염증을 느껴서 학교 현장을 훌쩍 떠나서 십 수년을 중국과 홍콩을 돌다가 돌아왔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또 이 일의 중심에 서있구나. 대학 입시가 이 시기의 우리 아이들이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는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에 나도 일조를 하는 샘이구나. 그런데 어쩌겠니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지금 자리에서라도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지. 물론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안 된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적합한 정보와 자료도 따로 준비해 두었다. 다음 주에 다시 설명회를 갖게 된다. 그나마 이 갈등의 상황을 우리 아들이 모두 끝냈으니 참 다행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여전히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늘 꿈 꾸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려고 노력하며, 무엇보다 책을 사랑하는 너에게서 희망을 본다. 네가 무엇이 되든지 아빠는 좋다. 너는 존재 만으로도 아빠에겐 축복이다. 생명공학으로 입학하고 나서 공부를 하다가 네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경제학을 복수 전공으로 선택해서 두 공부를 하느라 방학마저 반납하고 그동안 애썼다. 군대 기간 동안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잠시 쉬었다 가거라. 미뤄뒀던 읽고 싶었던 책도 실컷 읽거라. 눈앞의 불안함을 마음속에 떨쳐 버리거라. 네가 갖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믿고,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하나님과 친밀감을 유지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네 갈길을 보여 주실 것이다.


군대 생활 동안 야생마 같은 너의 에너지를 온유하게 잘 길들이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쓰거라.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을 갖은것은 나의 행복이고 엄마의 행복이며 예수 믿는 사람의 자랑이 될 거란다. 교회를 방문해서 네게 기도해 주었던 많은 목사님들의 말대로 너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이 너의 가는 길에 평생 기름 부으실 것이란 축복의 선포를 잊지 말렴.


집에 돌아왔다. 씻고 소파에 앉았다. 진짜 사나이에서 연예인들이 입소 첫날, 개인 소지품을 검사하고, 개인 피복을 받은 후에 저녁 배식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회에서 요리사 경력이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해서 배식을 담당하게 하더구나. 배식 중에 자기 소대 원들이 오니까 힐끔 쳐다보다니 두 배로 반찬을 퍼주더구나. 지난번 우리 아들 편지가 생각났다. 훈련소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가 배식할 때 여전히 고깃 덩어리를 넣어 주고 있니?


훈련병 시절, 너무 배고파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집착하는 자신에 대해 인간이 환경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배고픈 인간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이 나던 시간이었다. 군대는 인간의 가장 밑바닥 본능부터 하나씩 고뇌하기 시작해서 군 생활 기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계획까지 혼자 차근차근 해낼 갈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훈련병이었을 때 나름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 똑같은 처지이니 서로를 격려하고 이따금 배꼽 잡게 웃긴 녀석이 있어서 그 기간을 잘 보낼 수 있었다. 우리 아들 내무반 동기들은 어떤 친구들일까, 서로 즐겁고 재밌게 지닐 수 있는 친구들일까? 웃음을 좋아하는 우리 아들, 아니면 우리 아들이 분위기 메이커가 되면 되면 되겠지.

사랑하는 아들아 저녁 시간 평안하게 보내고 에너지 충전해서 즐겁고 기쁜 내일을 맞이하자.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 파이팅!!

keyword
이전 27화입영편지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