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영편지 30(1부 에필로그)

by 순례자

사랑하는 아들!


바람 한점 없는 회색빛 하늘이구나.

하루의 정규 일과가 일단 끝났다. 일을 해보면 학위 논문을 써야 하는 등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든 수도꼭지를 교체하고 막힌 하수구를 뚫는 일이든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다. 일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시간은 늘 바쁘게 지나간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고, 하면서도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 삶이 행복할 것 같다. 오늘은 하늘이 하루 종일 한 가지 색이다. 회색빛. 변화도 없고, 표정도 없는 참 재미없는 날이다. 이런 날도 우리 아들은 열심히 훈련했겠지. 고된 훈련의 나날이겠지?


사무실 창밖 숲에는 연초록 잎새들이 움을 트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여온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의 총 13권 중에 7권을 펼쳤다. 너도 아는 대로 주인공인 '오르필리아'(버나드, 리무)와 '비올렛'(모엘) 형제가 고아원에서 새로운 위기와 싸우면서 유언장이 걸려 있는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긴장감 넘치게 펼쳐진다. 이 책의 표지를 펼치니 겉장에 정성스럽게 만년필로 꾹꾹 눌러쓴 아빠의 메시지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네가 영어에 눈을 뜨고 한시도 손에서 이 책의 시리즈를 놓지 않는 것이 아빠는 기쁘구나. 책이 평생 네 벗이 되기를, 2004년 5월 7일 사랑하는 아빠가"


아들과 함께 보내던 시간이 꿈결같이 떠오르는구나. 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영국 선생님이 의욕은 넘치는데 영어를 못해서 수업 중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머뭇거리던 너를 방과 후에 불러서 이 책 제1권을 빌려 주며 편안하게 읽기를 권유했지. 나는 네게 몇 차례나 이 책을 사주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어느새 타임스케어의 책방 언저리 서가를 뒤적인다. 우리 아들이 이 책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기쁨을 상상하며 만년필을 꺼내서 책의 첫 장에 꾹꾹 눌러 메모를 적던 그때의 아빠로 돌아간다. 코 끝이 찡한 시간 여행이구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지만, 내 기억 속엔 참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의 책갈피가 되었구나. 그 아들이 이젠 아빠보다 훌쩍 컸고 원어민의 영어 수준을 갖춘 준수한 청년이 돼서 영어 통역병으로 입대해서 훈련받고 있으니 아빠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지.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활 중에 툭툭 던진 네 간결한 표현들이 참 산뜻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사는 것이지.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하든 만나는 사람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고 힘겹고 가슴 아픈 추억들은 망각의 강에 던져 버리면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다.

척박한 땅에 억센 뿌리를 내리고 해마다 가슴 서늘한 붉은 꽃을 피워내는 동백꽃처럼 자신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동백 같은 꽃을 피우는 우리 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빠는 네가 있어서 참 행복하다. 그리고 아빠 삶의 보람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인생을 아름답게 살거라. 젊음은 짧고 빠르게 지나간다. 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가슴에 품고 많은 사람이 네 그늘아래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큰 나무 같은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거라. 우리 예수님처럼.


창밖의 나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잎새에도 바람이 일지 않는가 보다. 지난겨울은 많이 춥고 길었다. 그래도 신기하지 죽었다고 생각했던 마른 나뭇가지에 연초록 순이 동그랗게 올라왔다. 살아있다. 나무는 혹독한 추위와 바람을 피해 어디에다 저 연초록 생명을 감쪽같이 숨겨 놓았을까? 어디에 생명의 수액을 간직했다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일까. 깊은 땅속 나무뿌리에 숨겨 두었을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혹독하고 척박한 환경이 올 때면 가슴속깊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나무들은 그 생명을 뿌리에 간직하는 걸까? 그저 본능에 충실해서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싸우는 걸까?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야고보서 1:2-12절 말씀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에 대해 소개한다.
종종 우리 삶을 침해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은 고통이다. 시련이 다가오면 우리는 쉽게 공황에 빠지거나 낙심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어려운 상황들은 우리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도록 만드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한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 1:2~4)라고한 것이다.


굳이 시련을 즐기라거나 고통을 찬양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더욱더 그분의 아들처럼 만들기 위해 우리 삶에 시련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으니 모든 일에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을 의지하거라.


잠 잘 자고 무엇보다 건강에 유의하거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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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영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연재 30회가 되었습니다. 한 아비의 보잘것없는 넋두리를 시간 내셔서 읽어 주시고 공감하고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기를 얻어 입영편지 2부로 계속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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