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인정하는 법

by 아우리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 한 편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성공의 궤도에서 미끄러진 한 중년 남자의 얼굴을 그린 드라마였는데요. 그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 얼굴은 어쩌면 우리 삶에도 조용히 비슷한 균열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흔들리는 기준 앞에 선 사람들

웹툰으로도 소개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은 한 중년 남자가 오랫동안 붙잡아 온 기준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과정을 그립니다. 25년 동안 지켜온 자리도, 안정이라 믿었던 아파트도 더는 그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깨닫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떠받치던 구조물이었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김부장의 몰락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불안이 닿아 있는 자리를 그대로 비추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직장, 집, 지위라는 기준은 사회가 정해 놓은 표준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곧 잘 사는 삶이라 믿으며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해마다 높아지고, 그만큼 더 쉽게 뒤틀립니다. 인정받는 사람의 값은 오르고, 뒤처지는 사람의 이름은 빠르게 지워집니다. 김부장은 그 틀 안에서 자신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틀이 깨지는 순간, 마치 자신도 함께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 불안은 결코 그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질문 앞에서 조용히 흔들리곤 합니다.
“요즘 뭐 해?”, “이 나이면 어느 정도는 됐어야지.”
그 사소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는 시간

드라마 속 김부장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흔히 직함이 나를 설명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본질이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부장이라는 명함이 사라졌지만, ‘김부장’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본질은 명함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저 역시 여러 시절을 지나며 비슷한 질문 앞에 섰습니다. 성공의 중간 어디쯤에서 머문 듯한 날들이 길어지면, 내가 잘하고 있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선택은 용기였고, 어떤 시간은 배움이었지만, 정해진 속도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의심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부장이 손세차장에서 다시 삶의 감각을 회복하듯 우리는 아주 단순한 순간에 다시 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작은 도움, 오늘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글 한 줄, 흙을 만지다 문득 느껴지는 고요함. 이 순간들은 크지 않지만 정직하게 나의 세계를 다시 세웁니다. 타인의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무게입니다.

사회는 여전히 '가성비'라는 잣대를 사람에게 들이댑니다. 누구의 시간이 더 생산적인지, 누구의 선택이 더 효율적인지 따집니다. 하지만 사람은 부속품이 아니고, 각자 다른 속도와 흐름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너무 쉽게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나를 지키는 삶의 기준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부장은 말합니다. 대기업 부장으로 버텨낸 삶도, 손세차장에서 땀 흘리는 지금도 모두 위대하다고. 그것은 성취에 대한 자찬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 자체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지금의 저 역시 그렇습니다. 군복을 벗고 조직 밖으로 걸어 나온 뒤에도, 글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통과해왔습니다. 거창한 성취는 없어도 누군가의 삶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오늘의 마음을 지켜낸 날들이 쌓여 왔습니다. 그 시간들은 조용하지만 충분했습니다. 사라진 자리는 있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삶이 더 많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기준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오늘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조금 느려도, 조금 돌아가도, 삶의 방향을 잃지 않았다면 이미 충분한 여정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기준을 따라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정말 나의 것인가.

사라진 자리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삶을 바라보며, 조용히 묻게 되는 시간입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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