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보다 먼저 놓친 신뢰에 대하여
며칠 전, 저는 쿠팡을 떠났습니다.
단순히 개인정보 유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과거 해외여행 중 카드 스키밍(Skimming) 범죄를 당해 카드가 무단 사용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보안에 있어서만큼은 강박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신거래 안심차단을 걸고, 해외결제는 원천 봉쇄하고, 한도는 최저로 낮춘 채 필요할 때만 올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안전장치는 거의 다 걸어둔 셈입니다. 그런데도, 나만 조심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개인이 아무리 빗장을 걸어도 정보가 새어 나가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터지는 사고는 늘 한발 늦게 내 삶을 따라오고, 그때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일까”라는 불안을 삼켜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 마주한 쿠팡의 사건은, 기존의 사고들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보통 대형 보안 사고가 터지면 기업은 먼저 고개를 숙입니다. 사과문이 나오고,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이 뒤따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번 쿠팡의 모습은 제 눈에 우리는 억울하다는 태도로 비쳤습니다. ‘유출’이 아니라 ‘노출’이라는 단어 뒤에 숨는 순간, 사고의 심각성보다 기업의 뻣뻣한 표정이 먼저 보였습니다.
저는 쿠팡을 ‘나스닥에 상장한 우리 기업’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장 소식이 들렸을 때 오히려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은 그 정체성이 얼마나 짝사랑에 가까웠는지 말입니다. 한국 시장에서 압도적인 수익을 올리면서도, 정작 한국 사회의 문제 제기는 마치 혁신을 방해하는 괴롭힘처럼 취급하는 듯한 장면들에서 기묘한 어긋남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정서'가 건드려졌습니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는 나라의 불안과 분노를 대하는 태도, 책임을 회피하는 화법, 사과를 미루는 고자세. 그것들이 쌓이자 저는 더 이상 이 플랫폼에 제 삶의 가장 내밀한 정보들을 맡기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그래서 탈퇴 버튼을 눌렀습니다.
하지만 떠나는 길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이미 결제된 와우 멤버십 때문에 탈퇴 처리는 한 달 뒤로 미뤄졌습니다. 떠나는 고객조차 깔끔하게 놓아주지 않는 경험은 마지막까지 고객 편이 아니라는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사실 쿠팡을 오래 써왔기에, 탈퇴 이후의 불편함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보니 별일 없었습니다. 이미 수많은 플랫폼이 제 생활을 충분히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저 ‘로켓’이라는 속도에 길들여져 있었을 뿐, 그것이 제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새벽배송이 없어도 아침은 오고, 필요한 물건은 어떻게든 도착했습니다.
물론 우려는 남습니다. 플랫폼에 대한 제재가 현실화되면, 그곳에 입점한 소상공인이나 배송 노동자들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목소리도 들립니다. 그들의 생계는 기업의 잘잘못과는 별개로 지켜져야 할 소중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생각합니다. 제대로 사과하는 법을 모르는 기업, 소비자의 불안을 가볍게 여기는 기업은 결국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두려움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야 다음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기술의 속도보다 책임의 무게를 먼저 아는 더 건강한 플랫폼들이 채워주기를 바랍니다.
떠나는 일은 가끔, 결심이 아니라 확인에 가깝습니다. 나는 무엇을 용인할 수 있고, 무엇은 끝내 타협할 수 없는지. 그 선을 긋는 순간, 탈퇴 버튼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나의 존엄을 지키는 작은 선언이 됩니다.
그 선언이 더 이상 유별난 일이 아닌 사회는 언제쯤 올까요.